양자역학/量子力學도가 말하는 앙자역학의 핵심
출처:
https://blog.naver.com/mylie13/을 것은 없을 것은 없을 것은 없을 것은 없을 것은 없을 것은 없을 것은 없을 것은 없을 것은 없을 것은 없221504967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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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여러분이나 필자나 아래 글의 전부를 읽을 것은 없습니다.
단지 그 결론만 챙겨 가면 됩니다.
이 글의 마지막에(붉은 색 글자) 가서
결국 양자역학의 핵심은 보어의 상보성원리에 있다
이상 여섯 마디에 있습니다.
닐스 보어의 이 상보성'相補性 원리는 <짝의 원리>에 대한 닐스 나름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나 상보성 원리는 음양론에 대한 물리학적 해석일 따름이고
짝의 원리의 정체(3위1체의 법칙)에는 접근도 못한 것입니다.
음양론도 그 자체만 놓고보면 역시 마찬가지 수준에 불과합니다.
비유하자면 목적지는 산의 정상 평평한 지대인데
자연과학(여기서는 물리학)계는 등산로를 따라 정식 등산 장비를 갖추고
한 걸음 한 걸음씩 올라오느라 무진 애를 쓰는데
따라서 정상도 보이지 않고 그 곳의 평지도 알 길이 없는데,
닐스 보어가 그의 가문 휘장으로 직접 도안해 옷섶에 자랑스럽게 달고 다녔던 배지
그의 상보성 원리를 상징하는 태극 문양이 선명하다
위에는 라틴어로 "상반/相反은 상보/相輔:라는 문구가 또렷하다
CONTRARIA SUNT COMPLEMEN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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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포스팅의 예고처럼 먼저 양자역학의 핵심을 따라가며 양자역학이 무엇인지 이해해보자. 서브컬처든 개똥철학이든 양자역학의 성급한 해석이란 느낌을 받는데 관객도 양자역학의 개념을 숙지한다면 다양한 작품 속에서 그 의미를 맛보는 재미가 다를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는가? (물론 문과에 수포자가 이해한 양자역학이라 틀린 설명이 있을지도 모르니 부담 없이 지적해 달라!)
우선 양자역학의 이름이 오히려 혼동을 주는 면이 있다. 양자의 영단어인 Quantum을 직역한 것인데 한자로는 헤아릴 양量 아들 자子이다. 네이버의 물리산책에 따르면 영어의 quantum은 양을 의미하는 quantity에서 온 말로, 무엇인가 띄엄띄엄 떨어진 양으로 있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띄엄띄엄 떨어진 존재의 운동을 다루는 물리학인데 실제 책을 읽고 나면 양자는 마치 빛의 입자인 광자光子나 정말 작은 존재인 미립자微粒子, 상보성 원리 또는 짝을 이루는 두 존재란 의미의 양자兩子라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든다.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들이 공전하는 태양계처럼 무거운 원자핵을 중심으로 질량이 아주 작은 전자가 움직인다. 그 운동은 거시세계의 고전 물리학이 통용되지 않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이렇게 매우 작은 미시세계의 양자적 관계에(쉽게 말하면 불연속적으로 연관이 있다거나 구성하는) 있는 입자들의 운동을 다루는 새로운 물리학이 양자역학이다.
양자역학을 논하기 전에 뉴턴물리학(그 전의 갈릴레오물리학은 차치하자)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를 간단히 살펴봐야 한다. 뉴턴이 창시한 뉴턴물리학은 관측자와 시간이 영향을 주지 않는 고정된 정적인 세계의 운동을 다루고 있고 아인슈타인의 특수, 일반상대성이론은 모든 관측자는 동등하며 시간까지 상호작용하는 움직이는 세계의 운동이란 점에서 다르다. 우리 현실을 보면 절대적으로 독립된 존재는 없고 늘 상호작용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아인슈타인은 이 복잡한 상황에서 모든 운동을 계산할 수 있는 상대성이론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것도 겨우 26세에! 괜히 아인슈타인이 천재의 아이콘으로 칭송받는 게 아니다. 특수상대성이론은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세계를 다루었고 일반상대성이론을 이를 확장하여 가속하며 움직이는 세계에서도 적용되는 것이 일반상대성이론이다.
상대성이론이 위대한 이유는 대부분의 운동을 설명할 수 있고 (물론 양자역학에서는 잘 안 먹힐 때도 있지만) 열역학 법칙처럼 다른 이론의 기준점이 되기 때문이다. 양자역학 이해를 위한 대중적인 관점에서 상대성이론을 생각한다면 2가지만 기억하면 될 것 같다. 모든 관측자는 동등하다(관측이란 행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빛보다 빠른 존재는 없다(빛보다 빠르면 의미 있는 상호작용을 할 수 없다).
이제 본격적인 양자역학의 시작이다.
1860년대 맥스웰에 의해 빛이 전자기파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빛이 파동이라고 생각했으나 뉴턴과 아인슈타인은 빛이 입자일지도 모른다는 이론을 주장했다. 빛이 입자인지 파동인지 확인하는 과정에서 막스 플랑크는 모든 에너지는 분명한 값을 갖는 아주 작은 덩어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선언했다. 플랑크는 복사 공식을 유도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에너지가 양자화 되어 있다는 발상을 처음 도입했지만, 이를 간파한 천재는 아인슈타인이었고 그의 첫번째 논문은 "플랑크의 복사 법칙이 성립하려면 빛은 작은 에너지 알갱이로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빛이 파동처럼 보이는 이유는 시간적으로 평균화된 특성이 우리에게 관측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함으로써 파동성과 입자성이라는 상반된 개념을 조화롭게 양립시켰다.
고전물리학으로도 대부분의 운동을 설명할 수 있었지만 고전물리학의 절대적 시간과 공간의 개념으로는 에테르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와 빛의 속도가 항상 일정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의 모든 법칙이 모든 관측자들에게 동일한 형태로 적용되어야 한다와 진공 중에서 빛의 속도가 항상 일정하다는 2가지 가정으로 이를 해결했다. 아인슈타인은 움직이는 물체와 시계에 나타나는 온갖 진기한 현상들은 '4차원 시공간'이라는 새로운 공간 속에서 조화롭게 하나로 통합했다.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에너지를 방출한 물체는 무조건 질량이 감소한다. 질량은 에너지의 척도이기 때문이며, 질량과 에너지가 서로 맞교환될 수 있는 양임을 만천하에 선고했다.
에너지의 양자화(에너지도 입자처럼 불연속적으로 띄엄띄엄 증가한다)가 범우주적 현상이라고 생각한 아인슈타인은 1907년에 고체 결정의 열용량에 관한 양자역학을 구축했다. 뉴질랜드의 물리학자 어니스트 러더펀드는 1909~1911년에 걸친 연구에서 “원자 질량의 대부분은 중심부에 있는 원자핵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보다 훨씬 가벼운 전자들이 마치 태양계의 행성처럼 그 주변을 공전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런 원자의 태양계 모형에서 원자핵 주위를 도는 전자의 움직임은 기존의 전자기학으로는 전자가 안정된 궤도 사이를 도약하며 돌아다니는 현상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기에 무언가 새로운 이론이 반드시 필요했고 그것이 양자역학이다.
하이젠베르크는 관측 불가능한 현상과 관련된 변수들을 관측 가능한 변수, 즉 전자가 궤도를 변경할 때 방출되는 스펙트럼선의 진동수 등으로 대치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는 무한히 큰 사격형 표(행렬, 행렬(matrix)이란 체스 판처럼 생긴 정사각형에 가로와 세로 방향으로 숫자가 할당된 2차원 배열을 말한다)에 들어 있는 각 항들을 제곱하면 스펙트럼선의 광도를 계산할 수 있다고 가정했다. 이와 같은 논리를 적용하여 임의의 양자도약에서 나타나는 스펙트럼선의 광도를 '모든 가능한 중간 도약의 곱'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이 곱셈 규칙은 계산이 간단하고 결과도 만족스러웠지만, 역설적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서로 다른 두개의 물리량(x와 y)을 곱할 때 이 규칙에 따라 계산을 수행하면 x에 y를 곱한 경우와 y에 x를 곱한 경우, 각기 다른 결과가 얻어진다. 이러한 행렬곱셈에서는 일반적으로 교환법칙이 성립하지 않으나(xy와 yx는 같지 않다) 양자역학을 거시적 규모에 적용하면 h는 0으로 접근하고, 따라서 qp-pq=0이 되어 고전물리학과 일치한다.(거시적 규모에서는 교환법칙이 성립한다)
슈뢰딩거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전자의 궤도를 안정한 파동함수의 매끈하고 연속적인 전이(transition)로 시각화시켰다. 핵 주변에 구속되어 있는 전자의 파동을 현실적인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막스 보른은 최초로 고전물리학의 통계적 확률과 파동함수로 대변되는 양자역학적 확률 사이의 차이점을 분명히 밝혔다. 고전역학에서는 임의의 순간에 닫힌 물리계의 상태(모든 구성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알고 있으면 그 계의 모든 미래를 정확히 알 수 있다. 그러나 계가 너무 크고 복잡해서 구체적인 정보를 '알 수 없는' 경우에 한하여 확률적(통계적) 접근법이 사용된다. 양자역학은 전이(transition)의 원인을 명확히 서술하여 전이의 결과로 나타날 수 있는 각 상태의 종류와 이들의 확률을 결정한다. 양자역학은 원인을 규명하고 가능한 결과를 나열할 수는 있지만, 이들 중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고전물리학과 달리 예측할 수 없고 순전히 확률에 의해 결정된다.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정성원리를 통해 고전물리학의 인과율에 사형선고를 내렸다. 전자의 위치가 정확히 관측될수록 전자의 운동량은 불확실해지고, 이와 반대로 전자의 운동량이 정확히 관측될수록 위치가 불확실해진다. 이 모든 내용은 방정식 속에 함축되어 있다. 원자핵 주변에서 움직이는 전자의 경로를 관측하려면 파장이 궤도의 폭보다 짧은 빛을 비춰야 하는데, 파장이 짧은 빛의 광자는 에너지가 커서 전자를 원래 궤도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만들기 때문에(즉, 궤도이 한 '점'밖에 관측할 수 없기 때문에) 전자의 '경로'를 정의할 수 없게 된다. 에너지와 시간 사이에도 극복할 수 없는 불확정성이 존재하여 둘 다 정확히 측절할 수 없다. 이 원리를 실제 상황에 적용하면 복사에너지의 양과 에너지가 방출되는 시간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원자에서 방출되는 복사에너지의 수명(높은 에너지 상태의 원자에서 방출된 복사에너지의 강도가 일정 비율까지 감소하는 데 걸리는 시간)과 에너지의 불확정성 사이의 관계는 위치와 운동량의 관계와 같다. 즉, 한쪽의 불확정성을 줄이면 다른 쪽의 불확정성이 증가한다. 그런데 수명의 불확정성은 고에너지 상태에서 광자가 방출되는 '정확한 시간'의 불확정성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수명 곧 광자가 방출되는 시간을 정확히 측정할수록 에너지 곧 광자를 방출한 원자의 에너지 상태의 정확한 값을 알 수 없게 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적 규모에서 실행되는 관측의 정확도에 근본적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어떤 대상을 어떤 방법으로 관측하든, 모든 관측 행위는 관측 대상을 필연적으로 교란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양자도약의 불연속적인 특성이 두드러지게 된다. 양자역학은 '관측 가능한 양'에 근본적 한계를 부과했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 관측 불가능한지 상상만 할 수 있을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이젠베르크는 고전물리학에서도 인과율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현재를 정확히 알면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는 것은 고전물리학의 결론이 아니라 가정이다. 현재를 정확히 아는 것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관측된 모든 것은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결과'가 아니라 수많은 가능성들 중 하나가 우연히 선택되어 나타난 것이다. 양자역학의 통계적 특성은 부정확한 지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므로, 우리가 인식하는 통계적 세계의 저변에 '진짜' 세계가 숨어 있다고 가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물리학의 본분은 관측된 결과들 사이의 상호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가정은 무의미하다. 즉, 모든 실험과 관측은 양자역학의 법칙을 따르므로 어떤 물리학에도 인과율은 성립하지 않는다. 양자역학은 '나올 수 있는 가능한 결과들과 각 결과들이 나올 확률'만 알려줄 뿐 한 번의 관측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미리 예측하지는 못한다. 이처럼 수많은 가능성들이 중첩된 상태에서 (관측을 통해) 하나의 결과로 결정되는 과정을 '파동함수의 붕괴(collapse of wavefunction)'라고 한다.
닐스 보어는 불확정성의 근원을 감마선 광자의 파동적 특성에서 찾아야한다고 주장했다. 광학 기계의 해상도에서 야기된 불확정성의 '고전적' 상호 관계를 이용하면 위치-운동량의 불확정성과 에너지-시간의 불확정성을 쉽게 유도할 수 있다. 파동묶음의 폭과 파장의 역수 사이에 불확정성이 존재하여, 이들을 곱한 값은 1보다 작을 수 없다. 진동수(또는 파장)가 다른 여러 개의 파동묶음을 더하면 피크가 좁은 영역에 집중되도록 만들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파동묶음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있지만 파장(또는 파장의 역수)에 관한 정보는 거의 대부분 상실된다. 이와 반대로 파동묶음이 정확한 파장을 갖도록 만들면 한곳에 집중되지 않고 넓게 퍼지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게 된다.
보어의 상보성원리(complimentary principle)는 '양자적 입자들이 파동성과 입자성을 모두 갖고 있으며 두가지가 동시에 나타나지 않지만, 계를 완벽히 서술하려면 두가지 관점이 모두 필요하다'는 원리다. 보어는 위치-운동량 및 에너지-시간의 불확정성이 고전적인 파동과 입자사이의 상보적 관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했다. 실험에 노출된(즉, 관측 장비와 모종의 상호작용을 교환하는) 모든 양자계는 파동성과 입자성을 둘 다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두가지 특성을 동시에 관측할 수 없기 때문에 '파동거울'과 '입자거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이로 인해 관측되는 양의 불확정성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하이젠베르크는 이것이 '관측장비의 부실함' 때문이 아니라 '관측장비를 선택함으로써 양자계가 둘 중 하나의 특성만 보여주도록' 가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이런 식의 강요를 하지 않으면 관측자는 아무것도 관측할 수 없다). 보어의 상보성원리는 운동량과 에너지 또는 위치와 시간 사이의 '2단계 상보성'으로 확장할 수 있다 관측자가 장비를 들이대지 않는 한, 원자 속의 전자는 안정된 궤도를 유지하면서 예측 가능한 운동량과 에너지를 갖고 인과율에 따라 움직인다. 그러나 전자를 위치와 시간이 고정된 시공간에서 서술하려고 하면 불연속적인 상호작용이 개입되어 인과율을 벗어나게 되고, 관측자는 양자적 확률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보어의 논리에 따르면 불확정성의 관계는 하이젠베르크의 '관측 가능한 양'을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을 한정 짓게 된다. 하이젠베르크는 자연이 어떤 방식으로든 수학 법칙을 따른다고 믿었으나 보어는 자연에 대한 이해가 수학이 아닌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했다.
파동-입자의 상보성, 불확정성원리, 파동함수의 확률적 해석, 파동이론의 고윳값과 관측 가능한 물리양(운동량, 에너지 등) 사이의 대응 관계 그리고 대응 원리 등은 1927년 하이젠베르크와 보어의 논쟁에서 얻은 값진 결과였고 이렇게 새로 탄생한 양자역학의 개념들이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별다른 반발 없이 빠르게 수용되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이런 추세를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정신'이라 불렀고 이것은 훗날 '코펜하겐 해석'으로 불리게 된다.
2000년에 인스브루크대학교의 안톤 차일링거가 이끄는 연구 팀은 벨의 부등식과 관련하여 아직 남아 있는 의문을 말끔히 해소하다는 목적으로 얽힌 관계에 있는 3개의 광자를 만들어냈다. 이들은 광자의 선형 편광 상태와 원형 편광 상태의 다양한 조합에 대하여 관측을 시도했다. 실험 결과가 양자역학과 일치했으므로, 국소적 이론은(양자적 얽힌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우리가 모르는 변수가 있다는 가설) 종류를 불문하고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언급된 실험에서는 한결같이 EPR(아이슈타인-포돌스키-로젠)의 주장에 반대되는 결과가 얻어졌다. 원거리 유령 작용의 실체에 대해서는 아직 논쟁의 여지가 남아있지만, "물리적 실체를 국소적으로 서술하는 이론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이 모든 것은 실험 장비의 성능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제아무리 기발한 아이디어를 적용한 해도, 파동성과 입자성을 동시에 관측할 수 있는 장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상보성원리의 핵심이다.(양자는 파동성과 입자성을 모두 갖고 있으나 동시에 관측할 수는 없다)
2000년 프리드먼 연구팀과 네덜란드 델프트에 있는 전자미세기술연구소와 MIT의 연구팀도 다른 방식으로 실험을 수행하여 미국의 과학 잡지 [사이언스]에 결과를 발표했다. 방법은 달랐지만 두 팀이 얻은 결과는 비슷했다. 물론 전자가 수백만에서 수십억 개 모여있다 해도 고양이의 몸집과 비교하면 너무나 작은 양이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다른 곳에 있다. 코펜하겐 학파는 관측에 의한 파동함수의 붕괴를 강력히 주장하면서도, 미시 세계와 거시 세계의 경계에 대해서는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양자적으로 얽힌 광자와 전자, 원자, 이온 등이 비국소적 성질을 확인했던 일련의 실험 결과가 당혹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양자 세계의 불가사의한 특성을 보여준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수십억 개의 입자들이 관련된 양자적 중첩 실험은 이 불가사의한 특성을 맨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었다. 훗날 앤서니 레깃은 거시적 중첩에 관한 책을 집필하면서 "실험실에서 재현할 수 있는 거시적 양자 중첩의 크기에는 원리적으로 한계가 없다"고 주장했다.최근 들어 영국 리즈대학교의 블라트코 베드랄 등이 [네이처]에 기고한 논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양자적 얽힘 현상은 아직도 많은 의문을 내포하고 있다. 앞에서 나는 양자적으로 얽힌 관계가 아주 크고 뜨거운 물리계에도 (이론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과연 그럴까? 그 밖에도 많은 의문이 남아 있다. 질량이 없는 물체의 얽힘은 질량이 있는 물체의 얽힘과 근본적으로 다를 것인가? 그리고 거시적 얽힘은 생명체에도 적용되는가? 만일 그렇다면 생명체들은 이 현상을 이미 생명 활동에 이용하고 있지 않을까?
얽힌 관계에 있는 입자의 영향이 상대에게 즉각적으로 전달된다면, 이 영향이 전달되는 속도는 빛보다 빠른 게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유용한 정보(메시지)를 전달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원거리 유령 작용'은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양자역학과 특수상대성이론은 화목한 관계는 아니지만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공존할 수 있다.
이로서 양자역학의 흐름과 핵심원리를 서술했는데 물론 나도 제대로 이해한 게 아니고 하나의 문장을 몇 번이나 곱씹고서야 의미를 겨우 가늠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이렇게 방대한 발췌를 한 이유는 “에너지는 연속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관측에 의해 실체가 변한다”는 직관과 어긋나는 진리를 교리로 하는 양자역학이 왜 탄생했고 어떻게 발전되었는가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처음 포스팅에서 언급했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원자의 구조를 스펙트럼 실험으로 관측하거나 수학으로 그 원리를 밝히는 것이야말로 수학과 과학의 위대함이다.
물론 그 양날의 검으로 현상 그 자체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수학이나 실험으로 입증하는 것은 끼워 맞추기의 인상도 든다. 특히 아인슈타인까지 행했던 사고실험들은 탁월성과 허무함을 동시에 느껴진다. 한 물리학자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인용한 것처럼 현재까지 관측된 내용으로 수립된 이론은 실체의 일부분만 왜곡해서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른다.(물론 수학적으로는 양자역학을 깨려는 실존주의적 저항 가능성 자체도 분쇄되었다) 또한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수학이 반대로 그 수학적 특징(특정 방정식의 특징) 때문에 새로운 법칙들이 유도되는 것이 어째 본말전도의 느낌이 들기도 한다. 결국 양자역학의 핵심은 보어의 상보성원리에 있다.
불연속적으로 띄엄띄엄 위치한 입자들은 파동과 입자의 속성을 모두 갖고 있으며, 절대 두가지를 동시에 관측할 수는 없지만 계를 완벽히 서술하기 위해서는 두가지 관점 모두가 필요하며, 이는 확률적으로 거시세계에 드러난다. 즉 하나의 입자가 여기에서 저기로 가는 길이 2가지가 있는데 어느 쪽으로 갈지는 알 수가 없으며, 각각 몇 %의 확률을 갖고 있는지 예측할 수는 있지만 실제 어느 쪽으로 갈지는 관측을 해야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두 가지의 공존할 수 없는 상태가 공존하는 것이 미시세계이며, 이는 관측으로 하나의 현실, 거시세계로 확정된다. 다만 잘못 이해하면 말장난일수도 있는 게 절대 볼 수 없는 상태에서는 모순된 상황이 확률적으로 공존하지만 결국 보게 되면 뻔 한 결론이 나버리는 것이다. 이런 양자역학은 천문학적인 예산이 들어간 CERN의 입자가속기를 통해 예측된 입자를 발견함으로써 정설로 굳어졌지만 단기적으로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초전도체의 원리와 반도체의 원리를 밝히고 양자컴퓨터나 나노기술에도 응용될 가능성이 높지만 공학발전이 뒤따르지 않으면 현실에서 구현할 수 없는 것이다.
양자역학의 철학적 논점과 거시세계에서의 적용은 다음 시간에 다루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꼭 이 [퀀텀스토리]를 읽어보길 권한다. 난해한 양자역학을 인물과 사건 중심으로 정리하여 이해에 도움이 되는 자연스런 흐름이 생기며, 다양한 논리실험을 기재하여 독자가 같이 참여할 수 있게 해준다.(물론 그 놈의 방정식은 보기만 해도 치가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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