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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31일 목요일

3운법칙(fashomo, trini homo)의 작명

 구원의 진리가 너무 간명하기에 
악인(죄인이 아닌, 죄인과 악인을 구별해야)을
(오만함이 그 대표적 악이니 사탄도 이로써 단죄된 것ㅡ딤전 3:6)
차단하시기 위해 여러 장애가 있는 바
그런 각종 장애 가운데

진화론이 있었고 무신론도 그 하나였었다




 

무신론 진화론 따위가 그런 장애라고 했지만 대규모의 어마어마한 장애가 나타날 것인 바 곧 "창조주 하나님"으로 가장하여 온갖 현란한 기적(초자연적 현상)으로 최후 발악적으로  세계인을 속이게 될 이른바 적 그리스도(anti-christ)의 출현이다. 성경도 이를 미리 언급, 경고하고 있다(살후 2:3-12). 영역(KJV)으로는 대단한 것(strong delusion)이라 번역하고 있으니 각성을 요한다. 그 때 가서 창조주를 시인하면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니 지금 이 때 이 시간 각자의 영원 운명을 결정할 일이다. 영원 운명이 바로 내 손 안에 있다는 사실ㅡ이 얼마나 충격적인 것인가. 잠 잘 때가 아니요 소스라쳐 깨어 있을 때다


  
바벨론 궁전 벽" 20세기 경고에 뒤이어  
이 세상 신(神)의 최대의 사기극 곧 연출될 것


3운법칙ㅡ3종류로 나타나는 운명이라니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나 운명은 운명이다. 세 가지 종류로 한정해서 사람 한 평생의 LP, DP는 물론 JP도 정해지니까. 여기서 그 누구도 빠져 나가지 못하니까.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한 목숨 사는 동안 날고 뛰든 또는 그렇지 못하든 대관절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장차 임하는 초자연 세계에서는 물거품처럼 모두 잊혀진다. 오직 단 한 가지, 이 세상 자연계 몸으로 있을 때 이 몸으로 우리가 행한 언어 행실(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가서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는다 하셨으니까-마 12:36) 즉 선악간에 행한(고후 5:10) 바를 따라, 이생이 그 때 가서 전생(前生)이 되는데, "전생"에서 행한 옳고 그름을 따라 심판 받는 대로 영원한 운명이 정해지는 것, 이것이 참으로 두렵고 떨릴 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3운법칙이 오늘날 소개되는 유일무이의 의의요 목적이다.

3위1체 원리의 의미는 단적으로 말해서 현상이 있으면 그 대칭(상칭, 대립)되는 것이 반드시 있다는 것이어서 그 나머지 존재 여부를 확인하느라 머리 싸맬 필요가 없다는데 있다. 이것이 있는 것은 저것 역시 당연히 있다는 바로 그 직접적 증거가 됨을 입증해주는 것이요, 그리고 이 법칙을 검증하는 것이 3운법칙이라는 것. 그리고 이 3운법칙의 핵심되는 요소가 19라는 숫자에 있다는 것.

그래서 이 세상 삶(진정한 정상적인 의미의 삶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그러나 삶에는 단 것도 있고 쓴 것도 있어 쓴 맛을 보는 것 역시 삶은 삶이니까 더구나 영원한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의미일진대 그 비중으로 말하면 영원 세상에서의 삶의 쾌락보다 더 엄중한 의미가 있다)의 운명은 규격화되어 움직여지나 즉 살아지나(살아가는 것이 아닌), 장차 전개될 나의 본격적인 생사 여부는 내 스스로 정하는 것으로서 사람답게(창조하신 애초의 의미대로) 살면 그 자유 선택대로 삶의 낙을 최고도로 향유할 것이요 그렇지 않고 이 삶의 법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자기 고집 곧 한 때의 편안함과 안일을 따라 자아중심으로 이 세월을 낭비하면 그렇게 심은 대로 거두는 것뿐이니 이야말로 사필귀정인 것이다.

고로 3운법칙이나 3위1체 원리 등이 세상 앞에 이제 뒤늦게 나타난 것은 이 엄중한 사실을 알고 "악함을 버리라"(행 3:26)라는 최후 경고이신 것이다. 만유의 법칙이라 해서 무슨 크나큰 과학계의 발견이나 한 것처럼 놀랄 일은 하나도 없다. 자연법칙만을 다루는 자연과학의 실험 검증의 한도를 벗어나 자연계의 영역 밖이니까 오직 상식과 이지적인 판단만 벗어나지 않는다면 어린 아이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사실상 이것은 인과론에 불과하여 상식 수준이다. 누구나 감으로는 그렇다고 인정했지만 확증은 못했는데 이제 그 진상이 이 기이한 3운법칙으로 만천하에 드러난 것뿐이다.

만법귀일(萬法歸一)라는 말이 있듯이 모든 복잡다단한 법칙과 원리원칙들이 하나로 귀일해버리면 너무 간단해서 그야말로 싱겁기 짝이 없고 허탈감마저 드는 것이다. 진리가 그렇다. 기본 법칙은 아주 간단한 것이지만 그것이 적용되어 있는 것을 세부적으로 뜯어가 보면 그야말로 웅장하고 방대하여 어렵고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기본 원리를 기반으로 하여 살피면 실상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듯하다. 대충 윤곽이 정해져 있으니까 그 테두리만 밟아 가면 되겠기에. 진리 특별히 구원에 관한 진리는 어린 아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간단 명료한 것이다. 한 마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언어는 어디서든지 통한다.

이 3운법칙이 아주 간단한 수치로 운영되는 것 자체가 누구든지 보고 직접 증험해 보라고 하시는 뜻임이 명백하다. 초등학교 학생들도 얼마든지 사람 생애를 게산해보고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라도 내일 아니 이 시간 후라도 얼마든지 사고사를 당하든 병사를 하든 그 영혼이 떠나갈 수 있는 판인데, 그 아이가 언제 어른이 되도록 구원의 이치를 이해할 만한 충분한 시간이 기다려줄 것인가. 지금이라도 진리를 깨달아 알고 믿어 사랑하면 사랑할 줄 알게 되면 넉넉히 영생에 들어갈 수 있도록 구원의 진리는 처음부터 극히 간단 명료한 것이다. 이런 시급하고도 동시에 너무나 간결한 것을 "신학"이라는 울타리 속에 가두어 마치 특정인만 깨달을 수 있는 것처럼 해놓은 것 자체가 큰 불찰이다. 신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나 계시를 무시한 신학은 백해무익임이 이제까지 입증되어 온 바가 아닌가.

아이나 어른이나 무식자나 유식자나 누구나 전비(前非)를 뉘우치고 올바르게 살고자 마음만 먹으면 그리고 이 세상이라는 거대한 장벽 곧 이 세상 신(神)이 쳐놓은 장벽을 사랑의 생명력으로 격파하여 나갈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누구든지 구원받아 영생하게 되어 있는 구조다.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을 마치 공짜로 영생 얻어 챙겨 가지는 것쯤으로 이제까지 "기독교"는 잘못 가르쳐 온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영생하는 자로 다시 출생하고 그래서 새로 창조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지 않다. 과거 죽은 상태에서는 어떤 의도 선도 행할 수 없었다.

다시 출생하여 새로 창조되면서 비로소 의와 선을 행할 수 있는 생명력을 얻음이다. 고로 의와 선을 행하기를 요구함은 당연하다. 잘못된 신학 교리는 일체의 행함을 배제하는 식으로 그래서 욕심 내고 자아중심으로 살아도 구원은 받는 것으로 착각하는데 위험천만의 것이다. 죽은 자로서 선과 의를 행하지 못했으나 이제는 산 자가 되어 충분히 생명력(이 생명력은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됨에 있어)을 가동시킬 수 있으므로 계명을 지킴이 요구되는 것이다. 계명이라고 무슨 거창한 것이 아니라 한 몸 체제에서 사는 법대로 사는 상식 수준이다.

즉 자기를 위하지 않고 한 몸을 이룬 머리의 지시를 따라 각 지체된 내 이웃을 위함이니 눈은 손을 위하고 손은 눈을 위하지 자기를 위해보아야 의미도 없을뿐더러 전체적인 자아를 형성하지도 못한다. 이렇게 자기를 위하지 않으니까 자기 부인이라 하는 것이니 자아중심에 대한 상대적인 용어다. 이 지극히 상식적인 계명이 내가 과거 죽어 있을 때에는 도저히 쳐다볼 수도 없는 태산이었기에 그래서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만 소극적으로 감당한 것으로서 이 곧 모세 율법으로 대표되는 것이다. 그것이 성문화한 것이 모세 율법이고 불문화한 것이 각자의 양심인 것이다(롬 2:15). 

이제 구원 받아 산 자가 되고 더구나 하나님의 양아들들이 되었으니까 당연히 이 생명의 법도를 지키는 것이 필수인 것이다. 법이라고 해서 강제성을 띠는 것으로 소극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우러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것으로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이니 내가 하고 싶어서 하고 원하지 않는 것을 아니하는 것이 자유인인 것이다. 우리의 구원됨을 자유인이 됨으로써 묘사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눅 4:18/요 8:32,36/롬 8:21고전 7:22/고후 3:17/갈 5:1,13/약 1:25).

영생하는 자로 새로 창조되었고 다시 출생했으니 당연히 믿는 오늘 이 시간 죽어도 영생이다. 인간의 노력으로 영생하는 것이 아니다. 재출생, 새 창조이다. 창조에 무슨 시간이 필요하며 내 노력이 요구되는 것인가. 나를 사랑하시어 나에게 자신을 몽땅 주셔서(바치셔서) 내 이름으로 죄인의 형벌(죄는 경중의 차별이 없고 똑같이 자아중심이므로 자아중심은 말 그 대로 자기가 중심이어서 자기 이외에 그 누구도 용납 못하기에 필연적으로 살인행위로 종착되는 것인즉 최고형의 중죄 곧 사형에 해당된다)을 나와 함께 받으신(나를 대신해서가 아닌) 그 십자가 사랑을 보는 순간 깨닫는 순간 나는 그 사랑에 감화되어 하나님께 대한 한없는 사랑이 나를 사로 잡게 되고 그리 되면 자연 그 뜻대로 살지 못한 과거 세월이 후회스럽고 다시는 그런 삶을 살지 않겠다는 회오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니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다.

이 "회개"는 종교적 또는 신학적 용어가 아니니 뉘우침, 회심, 개심, 전향 등 그 무엇이라 불러도 상관 없다. 죄, 악에서 선과 의(義)로 돌이킴이다. 이렇게 회개하게 되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을 말하는 회개의 세례를 받게 되고, 이와 같이 마지막 아담과 하나된 사실을 온 마음으로 믿어 감사하게 되면 엄마 품이 한 때 잃어버렸던 고아를 품게 되듯이 마지막 아담 친히 성령으로(아버지와 하나되신 아들이시므로 아버지와 하나되신 모습) 내게 임하시면 나는 그 순간 명실 상부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 아담으로써는 영으로 출생함이니, 육체로 이미 우리가 출생해 있어 첫 사람 아담의 육체를 물려받고 있는 터이므로 마지막 아담으로 말미암는 출생을 재출생이라 하는 것. 재출생이 원래부터 필요한 것이 아니나 아담의 범죄로 모든 인생이 이 죽음의 자연계 육체가 되어버려 망가졌기 때문에 재출생, 신창조가 아니고는 절대로 초자연계에 진입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새로 창조된 그래서 다시 출생함으로써 하나님의 양아들이 되는 것이다.

영원한 세계 즉 초자연계에서는 양자, 양녀 남녀 구분이 없이 거룩한 천사들처럼 된다. 바꾸어 발하면 모두가 아리따운 여성 같기도 하고 늠름한 남성 같기도 한 완전한 모습이 되는 것. 자연계 육체로는 남녀 서로 보완적이므로 남성 없이 여자만은 불완전하고 여성 없이 남자만으로 온전하지 못한 상태다. 처음부터 남녀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아담을 보좌할 짝을 정해주시려고 영물들(초자연계에서의 "각종 짐승들")을 만드셨으나 아담이 자기 짝이라고 가까이 할 만한 것은 아무도 없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인 자기와는 달라 좀 우스꽝스럽게 생겼으므로 그 별명을 붙여준 것이 그 이름들이다.

아담이 처음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 즉 흙으로써 창조될 때 남녀 성별을 가지지 않았다. 만일 남자로 만드셨으면 곧 이어 당연히 여자를 만드셨을 것이나 그렇게 하시지 않고 에덴낙원을 만드신 다음에야 "사람(아담)이 혼자 지냄이 좋지 않다" 하실 뿐 아니라 그렇게 말씀하신 후에도 여자가 아닌 "각종 짐승들"을 만드셨던 것이다. 그래서 그 중 하나를 택해 아담의 짝으로 삼고 나머지도 역시 모두 아담의 보좌역이 되게 하심이었다. 초자연계 몸으로 있으면 이 자연계 육체처럼 반드시 양성 구분이 되어야 인간을 생산하는 것이 아님은, 막강한 초자연적 능력으로 그리고 주변의 영물(靈物)들의 도움을 입어 능히 아담 혼자서 자식 생산이 가능한 것이다. 자연계 몸이 되면서부터 남녀 양성이 필수가 된 것뿐이다.

그래서 아담의 마음에 드는 자가 아무도 없으므로 아담과 똑같은 또 하나의 인간이 아니면 아담이 만족하지 않을 것이기에 자연계 동물들의 암수를 정하시어 만드신 방법으로 인간을 남녀 양성으로 구분하신 것이다. 이제 새 피조물 즉 다시 출생함으로써 마지막 아담을 기점으로 하는 새 인류는 남녀 구별이 없다. 멸망에 들어가 영원한 고통 속에 지낼 악인들도 초자연계 몸으로 변환되면서 성별은 사라진다. 영원한 멸망,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는 그 곳에서 고난 고통과 더불어 지내게 되어 있는 악령이나 악인이나 모두 자기 선택에 의한 것이다. 거룩한 천사들도 의인들도 옳고 (의롭고) 선한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어떤 대가를 무릅써서라도 자기 선택으로 그 삶의 법도(한 몸 체제에서의 자기 부인)를 준수했기 때문에 영원한 삶의 낙 속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산다는 것 자체에 죽음이란 있을 수 없다. 악인이나 악령들은 단지 생명의 반대되는 온갖 것을 겪고 영원 세월을 보내게 된다는 그 차이만 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자연계에 속하여 죽은 자가 되어 있는 처지에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회개하라고 하시는 명령에(행 17:30)  순응함으로써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성령의 선물을 받음으로-행 2:38/8:20/11:17) 말미암은 것이나 그래서 그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지면 영생에로 직행이나,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 세상에 남아 있는 동안, 과거 거룩한 천사들 중 일부가 사탄을 비롯해 교만한 마음을 품고 범죄 타락하였고 아담이 또한 범죄하여 죽음에 이른 것과 같은 똑같은 상황에 놓일 수 있는 개연성이 충분히 있는 것이지 그들과 차별되는 특별 대우를 받을 이유가 없다.

공평공정 공명정대하시므로 절대로 그 만드신 피조물을 차별하시지 않는다. 많은 자식을 낳은 부모가 똑같이 위하고 차별하지 않는 것과 같은 어버이 마음이시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있는 자가 되는 것은, 아담의 애초의 초자연계 몸으로 복구하는 의미이다. 이미 범죄하여 그 상응한 대가를 받고 있는 악령들이나 과거 아담과 다른 상황일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 한번도 영생하는 자로서 시험 받아 우리 믿음과 사랑이 저울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그 시험대에 놓여 있는 것이 이 세상의 의미이다. 시험 받기 위해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아니나 사람 살리시는 아버지의 일을 아들들로서 제대로 수용하는지의 여부가 자연스럽게 저울질되는 것이야 당연하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 과거 악령들이나 아담처럼 마음을 잘못 가져 교만해져 범죄하게 되면 그들과 같은 운명이 될 것은 필연이다. 오늘날의 사정으로 보면 지금까지 믿고 지내왔다고 스스로 자부하면서도 (그릇된 교리를 따라) 범죄를 했을 경우 거의 전부가 실제 믿지도 않으면서 구원 받은 자로 자처했을 것인즉 지금이라도 제대로 믿음에 들어와 회개하여 순종하기로 확약하고 확정하면 비로소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될 것이다. 나는 믿고 구원 받은  상태에 있으면서도 범죄했으니 다시는 용서 못받는 '고의적인 범죄 행위'에 걸린 것이 아닌가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끝까지 구원 받았다 고집하고 여전히 자아중심으로 나가면서 로마서 7장 타령만 하고 지낸다면 영원히 구제 불능이다. 지금은 시간이 없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아주 잘못된 종교적(성경에 의함이 아닌) 교리에 속아 자신의 운명을 망치는 사례가 거의 대부분이기에 이와 같은 3위1체의 원리라든가 3운법칙과 같은 특이한 것을 통해 다시 한번 회개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니, 이 말씀을 모든 인생들은 귀 담아 들을 일이다.

이 외침에 대한 부정적 반응은 거셀 것이고 이렇게 말하는 필자도 앞서 간 우리의 믿음의 선배 바울 사도가 "주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죽을 것도 각오하였다"(행 21:13) 한 그 말을 복창할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파하기를 작정한 사람마다 모름지기 이런 일사각오로 임할 일이다. 세상은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우호적이었던 역사가 없다. 이 세상 신(神)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다고 한 그대로다(고후 4:4/요일 5:19). 세상을 짝사랑하여 세상 삶을 유지 보전하고자 하는 데에서 온갖 기독교 비리는 싹튼다. 죽음과 고난에 초연할 것이니, 죽음에 대하여 너털웃음을 웃는 것이 오는 세대에서의 영광을 바라는 모든 자의 마땅히 취할 자세가 아닌가.

3운법칙을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입에 익숙한 이름으로 부르면 좋을 방법을 찾다가 라틴어를 원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fas homo라 한 것이다. 라틴어를 택한 것은 특정 국가 용어로 하면 국수적인 배타 감정을 갖게 될 수 있으므로 두루뭉실하게 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fas는 라틴어로 신 또는 하늘의 뜻, 명령, 법 등의 의미를 담고 있어 거기에다 사람이라는 homo를 덧붙인 것이다. 또 3운법칙은 3위1체 원리를 검증하는 것으로서 3위1체와 불가분이기에 3위1체 원리(the law of Trinity), 간략히 trini law와 일관성이 있게 trini homo로도 알리고 있다.

fas homo를 부르기 쉽도록 fashomo라 하기도 한다. trinitas라는 3위1체를 의미하는 라틴어도 정확히 의미를 반영한 것은 물론 아니다. triad(3개씩 1 벌)라는 뜻뿐이다. dyad 즉 두개씩 한 벌과 마찬가지로 우리 말의 신 한 켤레, 양말 한 켤레 등의 의미다. 애초 신학자들이  "삼위일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것도 그냥 편하게 지어 부른 것뿐이지 성경에 말씀하신 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의 의미를 제대로 안 것은 아닌 것이다. 다만 "3위 1체"가 널리 알려진 단어이기에 또 그런 용어가 성경에 말씀하신 바로 그 대목을 지적하는 것이므로 "3위1체 원리"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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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말 한 켤례를 영어로는 a pair of socks. 앞에 분명히 단수 a다. 뒤에는 복수 s가 붙는다. 이것이 3위1체 원리의 요강이다. 셋도 아니다. 사람 손이 둘이고 발이 둘로서 짝으로 되어 있는 생김새를 따름이다. 양말 하나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 항상 단위가 하나 즉 둘을 하나로 취급하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이 이 간단한 진리를 모르고 양말 하나만 고집한다. 자연계만 고집하고 피조물인 이 보이는 세계뿐이라고 한다. 창조자와 짝이 되어 한 켤레가 되어 있는 줄은 모른다. 인과론을 완전히 무시하고서 무슨 진리를 논하리요. 창조주께서 피조물과 하나로서, 자신처럼 위하시기에 나 위해 십자가 고통의 부끄러움과 죽음까지도 불사하신 것임을 모른다. 기막힌 일이 아닌가. 막된 자식이 들어 어머니 눈물을 마를 날이 없게 한다.

가까이 오시어 성을 보고 우시며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다면 좋을 뻔하였다. 지금 네 눈에 숨겨져 있구나"(눅 19:41).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다"(마 23:37). "숨겨져" 있는 까닭은 새끼가 암탉 앞으로 나오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당신 이름을 대입해보라. 성경은 내 이름을 대입해서 읽는 세상 유일의 책이다. 그러면 당신에게 들려주시는 거룩하신 이의 오열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인가.


은희야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다면 좋을 뻔하였다. 그러나 지금 네 눈에 숨겨져 있구나.  은희야, 은희야...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네가 원치 아니하였다...

확대 로마서 (5-끝)

확대 로마서 (5)



(골 2:20) 여러분이 세상의 초보 원리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its rules/regulations]에 순종함으로써, (골 2:21)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인데도 (골 2:22)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소멸되어지는 것}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골 2:23) 이런 것들은 자의적(恣意的)인 예배, 꾸민 겸손, 몸을 괴롭게 하는 데에는 지혜로운 것 같아도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다.


(골 2:14) 우리를 거역하고 우리를 대적(對敵)하는 의문에 쓴 바 요구 항목들[handwriting of requirements/certificate of debt with its requirements/the written code with its regulations]을 지워 버리시고 없애 버리셔서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골 2:15) 모든 다스림과 권위[註-우리를 속박하는]를 무력화(無力化)시켜 이를 명백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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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법문(法文) 즉 우리말 성경으로 "의문(儀文)"은 모세 율법에서 날(日)과 달(月)과 해(年)와 절기(節氣 또는 각종 유대인의 명절)를 지키고 제물을 드리는 각종 번잡한 법규 등을 만들어 그것을 준수하도록 명문화(明文化)한 것을 말하는데 반해, "성령으로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됨을 인한 자기 부인을 일상생활화함을 가리킨다. 고로 모세 율법을 말할 때는 이러한 법문 또는 의문을 가리키는 것이다.

모세 율법은 장차 오실 '실체'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그림자'로서의 의미이니,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한 제대로 지킬 수가 없는 하나님의 계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 대신 이런 형태적인 법식(法式)을 지키도록 함으로써 하나님의 계명 곧 생명의 원리대로 사는 삶의 핵심인 '자기 부인'의 맛만을 보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모세가 명령한 대로의 규례(規例)를 따라 지켜 나가면 1년의 거의 절반을 각종 명절 등을 지키는데 소요된다고 한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삶이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고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됨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우리의 삶 자체가 "새 계명"(요 13:34)을 토대로 하여 구축되어 있으므로 즉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는 까닭에 그런 모든 형태적인 것이 전혀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알지 못한다기보다 제대로 읽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는 우리가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데도"(고전 9:21) 하나님의 이 계명 곧 그리스도의 "새 계명"(요 13:34)을 지키지 않아도 구원은 된다고 바울이 말한 것처럼 여겨 엄청나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새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사랑하라"는 새 말씀이 첨가되어 있는 것이어서 이는 곧 자기 부인을 말함이니 모세 율법은 물론이거니와 그리스도 친히 말씀하신 "온 율법과 선지자"(마 22:40)보다 한층 더 엄격한 것이다.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니까"[고후 5:15/롬 14:7-9] 자연 그럴 수밖에 없다. 당신 자신을 깡그리 우리 위해 주시어 십자가에 죽으신 것처럼 그렇게 우리가 서로 사랑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새 계명"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성경을 잘못 이해하는 결과로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여"(빌 3:18) "멸망"(:19)을 자초하는 것이다. 본 '확대 로마서'는 이런 비극적인 결과를 경고하는 의미에서 편집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를 지으신 조물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이것이 자기 부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을 위하는 가운데 피조물 상호간을 [사랑으로] 위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본격적인 가르침 즉 원래부터의 생명의 법칙(계명 또는 율법)을 단지 맛보기로 가르치고 가리킴이 모세 율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가르침을 받아 행한다고 해서 구원은 될 수 없는 것이니 단지 그 이치만 그렇다는 것을 나타낼 뿐이고 그 원리대로 실제 행하며 영생할 수 있자면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새 창조를 거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기다리게 하신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로 이루어질 새 창조의 역사를 모세 율법은 그림자로 나타내어 미리 알리는 것이었다. 모세 율법은 이집트 노예로서의 속박으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풀려 나는 사건 즉 첫 유월절을 기점(起點)으로 하여 전개되고 있으며, 바로 이 첫 유월절의 내용이 그 핵심이고 그리고 그 중심이 레위인(Levi人)이다. 성전 업무를 비롯한 모든 하나님 섬김에서 이 레위 지파 사람들이 그 주축 역할을 한 것이다.


레위인들이 특별히 이렇게 선택된 것은 첫 유월절 사건 때 희생양의 피에 의해 목숨을 건진 모든 이스라엘 가정의 장자(長子)를 상징하도록 하나님께서 정하신데 따른 것으로서, 그렇게 살아 남은 이스라엘 장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나의 소유(所有)"라 선포하신 것이다. 이 의미를 따라 모든 레위인들은 평생 하나님의 일에만 전념하였다. 제사장들도 물론 이 지파에서 나오는 것이고 가나안 정복 당시 땅 분배에서도 제외되었다. 하나님 친히 그들의 배분(配分) 몫(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가나안 땅을 각각 배분 받았던) 즉 레위인의 "소유"가 되어 계신다는 그런 의미였다.


야곱(이스라엘)의 열두 아들 가운데 레위가 끼어 있어 그대로 하면 열두 지파에 들어 있어야 하나 이런 특별한 업무를 상징적으로 (우리의 구원을 나타내는) 하는 데에 선별되었으므로 레위 지파를 대신하여 요셉의 두 아들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우리 구원이라는 '실체'에 대한 '그림자'적 의미인 것이니, 우리가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바 되어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하나님 친히 우리 소유가 되셔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와 영원히 하나가 됨이다.


이 '둘이 하나됨'의 비결은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음이니 곧 자기 부인이다. 이 자기 부인이 첫 창조 당시 아담을 지으시고 아담을 위해 에덴낙원에서 각종 영물들을 지으시면서 아니 그 훨씬 이전 그룹과 스랍들을 창조하시던 때부터의 생명의 철칙인 것이다.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지으실(낳으실) 때부터의 생명의 철칙인 것이다.


그리스도 친히 아버지와의 이와 같은 둘이 하나되어 계시는 관계의 기본 틀을 여러 말씀을 명확히 밝히신 것이다. 요한 사도가 주장 여기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즉 아버지 안에 아들 계시고 아들 안에 아버지 계시는 등이 표현이 모두 이 둘이 하나됨의 영원한 진리를 말씀하심이다. 여기서부터 만물을 지으시고 보존하시는 기본 원리로서의 '삼위일체의 법칙'이 비롯되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3운법칙(trini homo)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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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 율법의 의미

(갈 3:15) 형제들, 사람의 법을 따라 말하거니와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해진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한다. (갈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씨, seed]"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시다.

(갈 3:17)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430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함이니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갈 3:18) 만일 그 상속 받음이 율법에서 나는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은 약속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갈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犯法)함을 인하여 가(加)해진 것이다. 천사들로 말미암는 중보(仲保)의 손을 빌어[행 7:35,53]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그리스도]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었다. (갈 3:20) 중보는 한편만 위한 이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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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이 20절은 제대로 이해하기 곤란할 정도로 원래 쓰여진 것으로 해석이 430 가지 이상에 달한다고 한다. 단 "중보"를 두고 논할진대,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딤전 2:5)이시라 했으니, 천사들이 당시 중보의 형태는 취했을지라도 진정한 중보 역할은 할 수 없는 것은 사람과 하나님을 동시에 위해야 하는데 하나님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동일한 하나님이시건만 천사를 통해서는 사람에 대한 대표성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면서 하나님,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라야 진정한 중보로서의 면모로 일할 수 있는 것이다.

구약 기록에서는 그런 표현이 없으나 신약 성경에 와서 특이한 것은 율법을 "천사들이 전한"(행 7:53) 것으로 규정하고 있음이다. 성령 충만한 사자후 끝에 죽임을 당한 스데반이 그 점을 강조했고(:35,53) 바울이 이상 구절에서도 보듯이 그러했고(갈 3:19) 히브리서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이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히 2:2). 왜 그리스도 오신 후로 새삼스럽게 이런 사실을 성경이 부각시키고 있는가?


이유는 앞에서 지적된 대로 율법이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까닭에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고 말씀하시고 한 일체의 일들이 천사들에 의해 되어진 일들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원래 볼 수 없고 우리 오관으로 감지되실 수 없다. 그래서 불 붙는 산이라든가, 음성[voice]이라든가 하는 하나님께 관련된 모든 것이 천사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사실들임이 밝혀지는 것이다.


타지 않는 가시나무 불꽃 중에 모세에게 나타난 천사가 하나님 대역(代役)을 한 것이다. 이것이 말하자면 중보의 역할이다. 실제 중보는 그리스도이시고 단지 천사는 그리스도 오시기까지 중보 대리(代理)처럼 활동한 것이다. 천사든 인간이든 모든 피조물은 피조물 피차간에 대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대리 역이다. 그래서 새로 창조된 새 피조물로서의 우리도 말에나 일에나 그리스도 이름으로 하는 것이다(골 3:17).


이것이 자기 부인의 본질이다. 천사나 인간이나 무릇 하나님의 피조물은 자기 부인이 그 특성이니 이 자기 부인이 사랑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친히 자기 부인이심은 말할 필요도 없다. 자기 중심은 자기 이름으로 하는 것이다(요 5:43). 그래서 모세 앞에서나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내리실 때나 천사가 하나님 대역을 한 것이다. 고로 천사를 통해 말씀하시고 역사하신 것이니 이는 앞에서 말한 대로 천사의 하는 일이나 말이나 모두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여 "보내심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보내심을 받는 이는 자기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하는 것이다(요 4:34).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히 피조물 각자 즉 우리의 이웃에 대하여 보내심을 받는 역할을 하는 것이니 이것이 곧 "하나님 섬김"(계 7:15)이다. 피조물이 이렇게 철두철미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는 이유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조물주 하나님 친히 자기 부인으로 시종일관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신다는 것은 자기를 위하시지 않고 오직 그 피조물 그리고 그 피조물 개개인을 위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모든 피조물을 몸으로 삼고 하나님 친히 그 머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심을 뜻한다. 머리와 몸의 관계가 삶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운영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고로 모든 피조물은 무조건하고 자기를 위할 필요가 없어서 아니하는 것이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 친히 자기를 위하시는데 자기가 자신을 위한들 그보다 덜 잘 위할 수는 없으니 이는 아주 합리적인 이치를 따름이다.


그래서 무릇 사랑은 모름지기 조물주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요 따라서 조물주를 인정함이 없이 그 어떤 사랑을 논하든지 그것은 공리공론에 불과함을 나타내는 것뿐이다. 세상 종교가 아무리 나름대로의 사랑을 주창해도 성경에서 나타나진 바된 조물주 즉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나지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한 무조건 인간 망상에 그칠 뿐이라 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인간에게 하나님을 나타내 주는 일에 천사가 그리스도 오시기까지 그 역할을 대행한 것이다. 때문에 마치 하나님 친히 나타나셔서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하는 모양새를 갖추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께서 '천사로 말미암아' 자기를 인간에게 나타내신 것이다. 왜냐면 천사가 한 것은 자기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이었고 지금도 역시 그러하다. 그래서 실제는 천사가 행하고 말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것으로 나타났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진정한 '중보(Mediator)'로서 천사가 했던 그 역할을 이제는 상징적이거나 대리 역으로서가 아니라 친히 그 실체로서 완벽하게 일을 치르시고 온전히 이루신 것이다. 즉 사람이 되셔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다 나타내셨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이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요 14:10) 하셨다.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시다"(요 14:24)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사로 말미암아 말씀하실 때는 천사는 영물(靈物)이라 권능이 있으므로 불 붙는 산과 나팔 소리 등 이를 보고 듣는 인간들이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했었다. 그러나 그런 그림자로서가 아닌 실체 즉 친히 인간이 되셔서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시고 하나님의 역사이시므로 인간 그대로의 형상이시고 형태이신 그리스도시다. 영물과 같이 우람하거나 자연계에 속한 우리 육체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그런 것이 아니신 것이다. 그러하나 실제는 이와는 아주 반대로 친히 하나님의 권위로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일이므로 종전에 천사가 나타낸 것과의 차이란 것은 하늘과 땅과 같은 것이다.


에덴낙원에서 인간이 신령한 몸으로 있을 때는 주변의 영물들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등 의사 소통이 가능했었다(시 103:20). 그러나 범죄의 결과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환원된 이후로는 인간이 하나님을 인지할 수가 없게 되었다. 물론 아담 부부가 그 대대손손 인생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쳤음은 사실이나 듣기는 들어도 금시 금방 타락해 가는 실정이고 아담 부부 또한 영원히 있지는 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렇게 비극적인 죽음의 육체 곧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하나님과 의사 소통할 수 있는 길이 막혀 버린 셈이다. 하나님은 영이신데 인간 육체(자연계에 속한)가 접근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과거 영계인 에덴낙원에 있을 때와는 다른 것이다. 이들 인간들을 구원해내시기 위해 어떤 방법으로 인간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느냐 할 때 방법이 없으므로 천사들이 이 작업을 대행(代行)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인간과의 의사 소통이지 그 살아 계심에 관한 것은 아니니, 그에 대해서는 바울이 분명히 언급한 바 있듯이 "그 만드신 만물로 말미암아 명백히 드러나져 있으므로 인간이 이에 대해 핑계치 못하게"(롬 1:19,20) 되어 있다. 아무리 인간이 자연계에 속해 있어 아담이 영계에 있을 때처럼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인지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사실은 인간에게 주신 지성과 이성으로써 그 지으신 만물을 통해 능히 알 수 있는 일인 거이다.


그래서 장차 오실 그리스도께 대해 미리 인간을 교육하시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인식시키시는 일에 천사들이 그 전달의 역할을 하게 하시니 이를 "중보" 역할이라 한 것이다.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의사 소통의 다리(橋梁) 구실인 것이다. 아담 부부가 범죄한 후에도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든지 노아와의 대화, 에녹과의 동행(同行), 아브라함과의 대화 등 하나님께서 인간과 물론 접촉하신 것은 사실이나 모두 천사를 매개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롯을 구원해내기 위한 아브라함과의 대화에서도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여러 천사들 중 하나가 하나님(이런 경우 하나님은 아들이시니 아들께서 말씀이시라 또는 아버지의 형상이시라 한 대로 겉으로 드러나는 일에서는 항상 "형상" 또는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대역(代役)을 한 것이다(창 18:22). 그래서 야고보가 임종할 때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使者)"(창 48:15,16)라 한 것을 우리는 기억하게 된다.


여기서 "사자"는 천사를 통하여 나타나신 하나님을 가리킴은 물론이다. 특별히 얍복 강 나루에서의 기도의 씨름이 그것이다(창 32:30). 여기서 야곱은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는 의미로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칭했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대역으로서의 천사를 대면했다는 그 의미이다(참조 구절: 창 16:13/출 24:10,11/신 5:24/삿 6:22/13:22/출 33:20/사 6:5).


그리고 하나님을 가리켜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to feed(KJV)/to be my shepherd(NIV)]" 하나님이시라 했는데, 어찌 야곱에게만 그러하셨고 그래서 그런 사랑의 칭송을 들으실 하나님이신가. 원래부터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대로 하나님도 이에 맞추어 가까이하시기 때문이다(약 4:8). 이 사실이 중요하다. 내가 가까이하지 않으면 멀쩡하게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부정하기까지도 하는 것이다.


사람마다 바보처럼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을 보이라 그러면 믿겠다" 한다. 마치 그 말이 모든 입(하나님을 시인하는)을 다물게 하는 최후 확정적인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내가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인간에게 나타난다면 적어도 인간이 그 형체를 제대로 알아볼 만큼의 규모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니, 인간이 못알아 볼 정도로 인간 보다 너무 커도 안되고 작아도 안된다.


그런데 아무리 크고 그리고 인간이 알아볼 만한 하더라도 이 방대한 우주의 크기에 비하면 먼지만도 못하다. 그렇다면 반응은 어떻게 나오겠는가? 당연히 말하기를 "이 광활한 우주의 크기에 비하면 저런 먼지만도 못한 형체로서의 존재가 어찌 조물주이겠느냐, 웃기는 소리하지 말아라" 할 것이다. 참으로 "바보"에게는 장단을 맞추어 주기도 무척이나 힘드는 일이다. 하나님을 볼 수 있어도 못믿고 보지 못해도 못믿으니 이런 한없이 어리석고 앞뒤가 철두철미하게 막혀 버린 인간의 석두(石頭)를 깨우칠 좋은 수가 없을까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오게 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렇게 만드시지는 않았다. 오직 인간 자신의 어리석음 또는 악함이 스스로를 그렇게 만드는 것이니 범죄가 그 좋은 예이다. 산 자로 만들어놓으셨지만 스스로 자기 자신을 죽은 자로 만든 것이 아담이 아닌가. 영물들 중의 사단을 위시해 악령들 역시 같은 모양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눈멀게 만드시지 않았지만 스스로를 눈멀게 만드는 것이다. 완전한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그리 되었은즉 이를 막고자 간섭하시거나 강제하실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가까이하신다고(약 4:8) 했듯이, 그와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도 우리를 버리시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롬 1:24,26,28).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2:6) 함도 그 때문이요, "저들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셨다"(마 13:58) 함도 같은 뜻이다. "나를 부인하면 나도 부인하고 나를 시인하면 나도 그를 시인한다"(눅 12:8,9/마 10:32/딤후 2:12) 하심이 이 때문이다.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것은 하나님더러 형체를 갖춘 피조물이 되어 달라는 말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피조물만이 형태가 있기 때문이다. 조물주를 마치 피조물처럼 착각하기 때문이다. 조물주께서 어찌 피조물이 되실 수 있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은 영이시다"(요 4:2)] 하는 이 말씀 이상으로 가장 합리적이고 온당한 의미는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영으로서의 특성 중 하나는 그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심에 있기 때문이다.


형체를 갖추시면 절대로 그리 되실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만물에 충만하셔서 만물 안에(in all) 계시고, 위에(above all) 계시고, 만물을 관통해(through all)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뵈었다"는 것은 형태를 갖춘 한 개체로서의 피조물인 천사가 하나님 대역을 한 것을 보았다는 그 의미이다. 성경은 이미 선언하기를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딤전 6:16)이시라고 선언한 것이다.


모세더러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다"(출 33:20) 하신 것도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말씀하심이고 천사를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심일 뿐이다. 보고 죽기커녕 아예 보는 것조차도 불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이 말씀하시는 것도 하나님 대리 역으로서의 천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시다. 모세가 이런 말씀을 들려 주시는 것 자체도 하나님의 말씀의 대역으로서의 천사의 음성인 것이다.


하나님으로 가장(假裝)하는 것이 아니라 대리하는 것으로서 그 의미는 월등한 차이가 있음은 물론이다. 그렇다고 성경이 이에 대하여 침묵을 지키거나 사람들로 혼동하도록 방치해두는 것도 아니다. 모세에게 나타나실 때도 미리 "하나님의 사자(使者)"(출 3:2)라고 분명히 밝히고 들어가고 있다. 이는 분명히 성경을 지어내고 하나님을 지어내어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증명하는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거의 하나다.


하나님을 지어내고 성경을 지어내었다고 한다면 이렇게 천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 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신약성경에 와서도 그것을 확정적으로 천사의 손을 빌어 말씀하시고 자신을 나타내었다는 말을 할 이유가 없다. 처음부터 하나님을 지어냈으니 그냥 당당히 하나님 친히 말씀하셨다, 행하셨다고 하면 편하고 간단한 일이다. 천사를 등장시킬 하등 이유가 없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시고 말씀하신 것으로 믿고 있는 까닭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인 구약 시대에서는 천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이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다만 사람들은 하나님 친히 인간과 접촉하셔서 인간에게 율법 등 일체를 주신 것이라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모세에게 "사자"가 나타났다고는 했지만 그 사자가 말했다고 하지 않고 그냥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 '실체'로서의 완전무결한 "중보"가 되어 계심을 인하여 과거에는 천사들이 이런 '그림자'로서의 역할을 했던 사실을 밝힐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니 즉 친히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이시니,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완전한 다리(가교), 통로, 길이 이뤄진 것이다. 하나님을 인식하려 할 것 없이 그리스도의 모습만 보면 되는 것이고 그 말씀을 들으려고 할 필요가 없는 것은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육체적으로 뵐 수 있고 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완벽한 의사 소통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완벽한 중보로서의 자리에 위치해 계심이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피조물 사람이 되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피조물이 곧 사람 아담이었다. 사람이 되심도 인간이 범죄함으로써 스스로 멸망에 빠질 위기에 처하여 이를 구제하시고자 결단하신 데에 따른 것이다.


비록 피조물 인간이 되시더라도 무엇이든 먼저 이루어지는 것은 중도에 결단코 변경될 수 없다는 하나님 역사(役事)의 특성으로 인해, 아버지와 아들과 하나되심 즉 하나님되심은 변하지 않는다(히 6:17,18). 그래서 하나님이시자 사람, 사람이시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으로서의 위치가 영구적으로 확정된 것이다.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그 영이 하나님 곧 하나님의 영, 아들의 영이시기에 그렇고, 사람이시라는 것은 영구적으로 사람의 육체를 입으셔서 성령과 인간 육체가 불가분이 되어 이제는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앞에서 지적하여 밝힌 대로, 하나님은 우리가 그 말씀과 그 만드신 만물 외로는 그리고 친히 사람이 되어 자신을 나타내신 이런 명확한 사실 외에는 달리 우리가 인지할 수가 없고 인지하도록 되어 있지가 않다. 이는 영원을 두고 그렇다. 하나님 살아 계심은 그 만드신 만물과 더불어 그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자체 증명하는 여러 증거만으로 충분하고도 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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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3: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장차 오실 것이라는 그리스도와 관련된]을 거역하느냐? 결코 그럴 수 없다.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올바름 따라서 죄 없음 즉 죽을 필요가 없고 영생할 수 있다는 의미-註]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을 것이다. (갈 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게 될 약속을 믿는 이들에게 주려 함이다. (갈 3: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던 것이다.

그림자로서의 모세 율법


(히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물로는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온전케 할 수 없는 것이다.


(히 10:2)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됨으로써 다시는 죄를 깨닫는 일이 없었을 것이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않았으랴. (히 10:3) 그러나 이 제물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니 (히 10: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다.


(히 10: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제물과 예물을 원치 않으시고 오직 나를 위해 한 몸을 예비하셨다. (히 10:6) 번제물[燔祭物]과 속죄 제물[burnt offerings and sacrifices for sin]은 기뻐하지 않으시니 (히 10: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 보십시오, 두루마리 책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했다" 하심과 같다.

(히 10:8)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물과 예물과 번제물과 속죄 제물[offering and burnt offerings and offering for sin]은 원치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으신다 하셨고{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다} (히 10: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십시오, 제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다. (히 10: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은 것이다.


(히 10: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물을 드리되 이 제물은 어느 때든 죄를 없애지 못하지만 (히 10:12) 오직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위한 한 영원한 제물로서 [자기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히 10: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니 (히 10:14) 그가 그 한 제물로써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신 것이다.


(히 10:15) 또한 성령께서 우리에게 증언하시니 (히 10:16) 곧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날 후로는 그들과 세울 언약이 이것이다"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할 것이다" 하신 후에 (히 10:17)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치 않을 것이다" 하셨으니 (히 10:18) 이렇게 죄를 용서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해 제물 드릴 것이 없는 것이다.


(히 10:19) 그러므로 형제들,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성소[聖所]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으니 (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해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다.


(히 10: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니 (히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율법과 양심


(롬 2: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는다.


(롬 2: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음이다.


(롬 2: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本性]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니 (롬 2: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기도 하며 변명하기도 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작용을 나타낸다}

유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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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아래의 이 "유대인" 항목은 특별히 현재도 성령으로 다시 남이 없이 그냥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 즉 기독교라는 특정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겠다. 이 두 양상이 너무나 흡사한 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이 모세 율법 부분은 복음과 양면성을 이루고 있는 것이므로 그 그림자적 의미로서의 취지는 변함이 없고 오늘날도 유효하다. 다시 말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서의 저주 받음과 죽음밖에 없다는 사실을 모세 율법을 통해 알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한 구원이 실효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모세 율법을 연구하고 공부하라는 뜻은 결코 아니니 오해하지 말 일이다. 그 형태와 제도, 예법 등은 그리스도 오신 후로 그 그림자적 소임을 다한 것으로서 바울이 지적한 대로 더 이상 우리와 관련이 없지만, 그 그림자로서의 본 뜻만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복음만큼이나 중요하니 동전의 양면성과 같기 때문이다.


즉 모세 율법에 대한 지식은 없다 하더라도 자기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일체의 살 소망이나 삶을 완전히 포기할 정도라는 것(그것이 죽음과 저주의 의미다)을 실감하지 않고는 아무라도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없음을 주지시켜야 하는 것이다(요 6:65). 이를 가리켜 아버지께로부터 배우는 것이라고 확언하셨는데 그 "배운다"(:45)는 것이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키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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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롬 2: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롬 2:19)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롬 2:20) 어리석은 자를 인도하는 자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 스스로 믿으니

(롬 2: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않느냐? 도둑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롬 2: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하게 여긴다는 네가 신당[神堂-우상을 만들어 앉힌 곳]의 물건은 도둑질하느냐?


(롬 3: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롬 3:2) 갖가지로 많으니 첫째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다.


(롬 3:3)  그 중 어떤 자들이 믿지 않았다면 어찌 되는가. 그렇게 믿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폐해지는가? (롬 3:4) 그럴 수 없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 것이다. 기록된바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능히 옳다 인정 받으시고 심리[審理]를 받으신다면 능히 설득시키신다" 함과 같다.


(롬 3:5) 그러나 우리의 불의함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했다면 어찌 되는가.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거니와, 그럼에도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불의하시다 하겠는가? (롬 3:6) 결코 그렇지 않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랴.


(롬 3:7)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써 하나님의 진실하심이 더 풍성해져 그 영광이 되었는데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게 되는가?" 할 것인가. (롬 3: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할 것인가. {혹자는 우리가 이런 식으로 말한다고 비방(誹謗)하나} 그들이 정죄[定罪ㅡ단죄] 되는 것이 옳다.


(롬 3: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했다.


죄가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인 것


(롬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랴. 율법이 죄냐? 그럴 리 없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했을 것이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않았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롬 7: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 각양 탐심을 이루었으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다. (롬 7:9)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자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다. (롬 7: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 (롬 7: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 것으로 나를 죽인 것이다.


(롬 7:13) 그러면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리 없다.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해 선한 그 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다.


(롬 7:12)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다. (롬 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영에 속한 줄, 성령에 속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다.


(롬 7: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미워하는 저것을 함이다. (롬 7:16) 만일 내가 원치 않는 저것을 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니 (롬 7: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다.


(롬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줄을 아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다. (롬 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치 않는 악은 행한다.

(롬 7:20) 만일 내가 원치 않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다. (롬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이치]을 깨달았으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다.

(롬 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본다. (롬 7:24) 슬프다! 이 비참한 자여!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리요! (롬 7:25)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런즉 내 자신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것이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에게는 결코 정죄[定罪ㅡ단죄(斷罪)]함이 없으니 (롬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했음이다[중복].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을 단죄하심으로 (롬 8: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성령]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다[중복].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롬 12:2) 여러분은 이 세대[이 세상]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않으니 겉 사람은 폐멸(廢滅)해 가나[to be perishing/be wasting away/gradually decaying/]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되심


(롬 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으니 (롬 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군림해 온 것 같이 은혜 또한 의로 말미암아 군림하여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다.


(롬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한 율법의 종결이 되신다.

모세 율법에 대하여 죽음


(롬 7:1) 형제들,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거니와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롬 7: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난 것이다. (롬 7:3) 그러므로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간음한 여자라 부르지만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간음한 여자가 되지 않는다.


(롬 7:4) 그러므로 내 형제들, 여러분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다.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


(롬 10:5) 모세가 기록하기를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 것이다" 했거니와 (롬 10: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 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롬 10:7) 또는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다.


(롬 10:19) 그러나 내가 말하지만, 이스라엘이 알지 못했느냐? 먼저 모세가 말하기를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 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할 것이다" 했고 (롬 10:20)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게 말하기를 "내가 찾지 않은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구하지 않은 자들에게 나타났다' 하셨다" 했고 (롬 10:21) 이스라엘을 대하여는 말씀하시기를, "순종치 않고 거역하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다" 하셨다.


(롬 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지만,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다. 나도 이스라엘 사람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다. (롬 11: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은 버리지 않으셨으니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여러분이 알지 못하느냐? 그가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고소하기를, (롬 11:3) "주님, 그들이 주님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님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습니다" 하니 (롬 11:4)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해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 7,000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롬 11: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는 것이다.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을 주심


(롬 11: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할 것이다. (롬 11:7)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해졌다. (롬 11:8)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다.


(롬 11:9) 또 다윗이 말하기를,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해주시고 (롬 11:10)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했다. (롬 1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거니와 그들이 다시는 회복할 수 없도록 넘어져 실족했느냐? 그럴 수 없다. 그들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부러워하도록 만들어 자극 받게 하려 하심이다.


(롬 11:12)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유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유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에 이른다면 얼마나 풍성하랴! (롬 11:13) 내가 이방인인 여러분에게 말한다.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니 (롬 11:14)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부러워하도록 만들어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다. (롬 11:15)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임이야 죽음 가운데에서의 생명이 아니면 무엇이랴. (롬 11:16) 제물로 드리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그것을 만든 떡 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다.


(롬 11:23) 그들도 믿지 않는데 거하지 않으면 접붙임을 얻을 것이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다.


(롬 11: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롬 11:25) 형제들, 여러분이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해 이 비밀을 여러분이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않으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됨이다.


(롬 11: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셔서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롬 11:27)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다" 함과 같다.


(롬 11:28)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여러분을 인하여 원수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다. (롬 11:29) 하나님의 은사[선물들]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롬 11:30) 여러분이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않았으나 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여러분이 긍휼을 입었으니 (롬 11: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않으나 이는 여러분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롬 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않은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다.


(롬 11:33) 심오하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유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가늠하지 못하리라. (롬 11:34)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謀士]가 되었느냐? (롬 11:35) 누가 주님께 먼저 드리고 그 갚으심을 받겠느냐?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님에게서 나오고 주님으로 말미암고 주님에게로 돌아감이다.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시기를. 아멘.


할례의 수종자


(롬 15:8) 내가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해 할례를 따르는 이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롬 15:9)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다. 기록된 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다" 함과 같다. (롬 15:10) 또 말하기를, "열방들아, 주님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했으며 (롬 15:11) 또 "모든 열방들아, 주님을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하라" 했으며 (롬 15:12) 또 이사야가 이르기를,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해 일어나시는 이가 있을 것이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둘 것이다" 했다.


(고후 3:9) 정죄[定罪-단죄(斷罪)]하게 하는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롭게 하는 직분은 더욱 영광에 넘칠 것이다. (고후 3:10) 과거 영광스러웠던 것은 보다 더 큰 영광이 나타남을 인하여 더 이상 영광될 것이 없는 바 (고후 3:11) 없어질 것도 영광스러웠으니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스러운 것이다.


(고후 3:12)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니, (고후 3:13) 이스라엘 자손들로 하여금 이내 사라져 버릴 그 얼굴의 영광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모세가 수건으로 가린 것 같이 우리는 하지 않는다. (고후 3:14)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겨지지 않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야 없어질 것이다. (고후 3: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가리고 있다. (고후 3:16) 그러나 언제든지 주님께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질 것이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


(갈 2: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으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


(갈 2: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는 과정에서 죄인으로 나타난다고 그리스도께서 그러면 우리로 죄 짓게 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다. (갈 2:18) 그리 되면 내가 헐어놓고 다시 이를 세움으로써 원칙대로 하지 않음과 같이 되어진다. (갈 2:19) 율법으로 말미암아 내가 율법을 향해 죽은 것이니 이는 하나님을 향해 살고자 함이다. [註-여기서의 "율법"은 모세 율법을 말함이다.


율법의 행위

(갈 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려 하지 않으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신 것이 된다. (갈 3:1) 어리석다,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여러분의 눈 앞에 명백히 보이는데도 누가 여러분을 꾀더냐. (갈 3:2) 내가 여러분에게 다만 이것을 알고자 한다. 여러분이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갈 3:3) 여러분이 이 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 3:4) 여러분이 이 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갈 3:5)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갈 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다. (갈 3: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는 이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 것이다. (갈 3:8) 또 하나님이 이방 사람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했으니 (갈 3: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이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 것이다.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사람들은 저주 아래 있으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않는 자는 저주 아래 있다" 했음이다. (갈 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 것이라" 했음이다. (갈 3: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를 행하는 자가 그 가운데서 살 것"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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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살 것이라" 한 것은 살 수 있다는 그 뜻이 아니라 단지 "행하면 살 수 있다"는 뜻이니, "행하라"는 원래의 뜻은, 행할 수 없음을 자각시키기 위함이다. 그러면 믿음은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를 믿어야 비로소 그렇게 행할 수 있다는 그 의미다. 고로 그리스도 없이 행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율법)행위로 구원 얻으려는 것"인(세상의 모든 종교도 이 범주에 속한다) 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으면 얼마든지 행할 수 있고 따라서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아는 것이 "은혜와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차이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법질서를 행하는 것이 우리가 영생에 이르게 되는 하나님의 뜻이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절대로 그 누구도 행할 수 없다는 데에 핵심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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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

(롬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이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으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다.


(롬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다. (롬 5: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


(롬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이 증언한 것으로서 (롬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의[義]로서 차별이 없다.


그리스도로 인도하기 위한 모세 율법


(갈 3:24) 이 같이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안내자[우리말 번역은 "몽학선생"이니 영역으로는 "tutor"로서, 한 가정에서 그 집의 자녀들을 훈육하며 보살피는 역할의 책임이 있던 가정교사 또는 보호자]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었다. (갈 3: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이 안내자 아래 있지 않다.


(갈 3:28) 여러분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이다. (갈 3:29)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 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하나님의 상속을 받을 사람이다. (갈 4:1) 내가 또 말하는 바는 상속을 받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갈 4: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後見人)과 가정집사(家庭執事)[註-이 모두 앞서 설명과 같이 주인의 자녀들을 일정기간 가정 교육을 시키던 직책] 아래 있었던 것처럼 (갈 4: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는 이 세상의 초보 원리[모세 율법을 가리킴] 아래 있어 거기 매여 있었으나 (갈 4:4) 때가 차니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갈 4: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贖良)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장래 일의 그림자


(갈 4:8) 여러분이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함으로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게 매여 있었더니 (갈 4:9) 이제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보 원리[모세 율법] 아래로 돌아가 다시 거기 매여 있으려 하느냐? (갈 4:10) 여러분이 날[days]과 달[months]과 해[years]와 절기[節期, seasons]를 따라 [모세 율법을] 삼가 지키니 (갈 4:11) 내가 여러분을 위해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렵다. (골 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 절기[a feast day]나 월삭[a new moon] 이나 안식일[sabbaths(NKJV), a Sabbath day(NIV)]을 인하여 누구든지 여러분을 비방할 수 없으니 (골 2: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로서 그 실체가 그리스도이시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이제 되어 있기 때문이다.


(히 7:18) 이전의 계율이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히 7:19)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했다} 이에 더 나은 것을 기대하게 되었으니 이 더 나은 것으로써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


(히 4:14) 그러므로 우리에게 대제사장[high priest]이 계시니 승천하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시다. 우리가 이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 일이다. (히 4:15) 우리에게 계시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감(體感)하지 못하시는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이시다. 그러나 죄는 없으시다.


(히 4:16) 그러므로 우리가 불쌍히 여기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다. (히 5:1)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하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들을 위한 예물과 속죄하는 제물을 드리게 했으니 (히 5:2) 무식하고 미혹된 자들을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다. (히 5:3) 이러므로 백성을 위해 속죄제물을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해 드리는 것이 마땅했다.


(히 5:4)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했다. (히 5:5)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더러 이르시기를, "너는 내 아들이니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신 것이다. (히 7:20) 또 예수님께서 제사장된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히 7:21) {그들은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나 오직 예수님은 자기에게 말씀하신 이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신 주님께서 맹세하시고 말씀하셨으니 뉘우치지 않으실 것이다" 함과 같다}


(히 7:22) 이와 같이 예수님은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 (히 7:23) 그들 제사장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나 (히 7:24) 예수님은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않는다.


(히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이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그들을 위해 간구하심이다. (히 7:26)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시다.


(히 7:27) 그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해 날마다 제물을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다. (히 7:2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신 것이다.


(히 8:1)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계심이다.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히 8:2) 성소(聖所)와 참 장막(帳幕-모세가 하늘에 보이신 모형을 따라 지었던 것으로서 성전[聖殿]이 건축되기 이전의 이동 성전[移動聖殿])에서 섬기시는 분으로서 이 장막은 주님 친히 베푸신 것이요 사람의 손으로 된 것이 아니다.


멜기세덱


(히 5:6) 이와 같이 다른 데 또한 말씀하시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체제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므로 (히 5: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체제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신 것이다. (히 5: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여러분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렵다.


(히 6:17) 하나님은 약속을 상속 받는 이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으니[중복] (히 6:18) 이는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세상의 악을] 피해 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또한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는 이 두 가지[그 뜻이 변치 않음과 거짓말하실 수 없는]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다[중복]. (히 6:19)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과 같아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揮帳) 안의 지성소(至聖所, the inner sanctuary behind the curtain)로 들어가게 됨이니 (히 6:20) 예수님께서 멜기세덱의 체제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시어 우리를 위해 그리로 앞서 들어가셨기 때문이다.


(히 7:1)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빌었으니 (히 7:2) 아브라함이 자기의 일체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이름을 번역하면 첫째, 의의 왕이란 뜻이다. 그리고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란 의미다. (히 7:3)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머물러 있다.


(히 7:4)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한 것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다. (히 7:5) 레위 자손들 중 제사장 직분을 받는 이들이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 곧 자기 형제인 백성들이라도 그들에게서 십분의 일을 받으라고 율법이 지정하고 있으나, (히 7:6) 레위 족보에도 들지 않은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도리어 십분의 일을 받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있는 그를 위해 복을 빌었으니 (히 7:7)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은 것이다. (히 7:8) 전자의 경우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음이었으나 후자의 경우 산다고 증언된 자가 받았다.


(히 7:9) 또한 십분의 일을 받게 되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으니 (히 7:10)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다. (히 7:11) 레위 계통의 제사장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백성이 그 아래에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체제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체제를 따르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는가.


(히 7:12) 제사장 직분이 변경되었은즉 율법도 반드시 변경될 것이니 (히 7:13) 이는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즉 레위 지파가 아닌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함이다. (히 7:14) 우리 주님께서 유다[지파]로 따라 나신 것이 분명하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해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히 7:15)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다. (히 7:16)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않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된 것이니 (히 7:17)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체제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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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과연 어떤 인물이며 누구인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머물러 있다"(히 7:3) 했으니 여기에 해당되는 것은 아담밖에 없다. 천사는 "시작한 날"이 있는 것이니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또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the order)를 좇는 제사장"(히 5:6)이시라 했으니 사람이어야 한다.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와 비교되는 인물은 아담밖에 없다.

영물들인 천사도 시작한 날이 있는데도 "시작한 날이 없다" 했으니 유일하게 아담만이 여기에 해당된다. 왜냐면 아담은 자연계에 속하면서도 동시에 영계에 속한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시작한 날이 있다 없다 하는 구분은 영계(靈界)면 영계, 자연계면 자연계로서의 시작한 날이 있게 마련이다. 전자에는 천사들 즉 영물들이 해당되고 후자는 우리 인생들이 그러하다. 그러나 아담은 인간이면서도 자연계와 영계에 걸쳐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시작한 날을 말할 때는 당연히 이 자연계에서 출생한 때를 말함인데 아담만은 유일하게 이 자연계에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계(靈界)인 에덴낙원으로부터 추방되어 자연계에 발을 디디기 시작한 때로부터 아담은 한 살, 두 살로 나이를 먹어 간 유일한 존재인 것이다. 영계에서는 이 자연계의 햇수로 치면 과연 얼마나 있었는지 가늠할 수조차도 없는 일이므로 "시작한 날이 없다"는 조건에 유일하게 들어맞는다. "시작한 날"이라는 표현은 자연계를 기준으로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담이 거의 천년 수명을 채우고 죽었는데 어찌 아브라함 당시에 살고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성경은 그가 "영원히 있다"고는 하지 않았으니 그런 표현은 하나님께만 해당이 되는 까닭이다. 단지 그가 존재하기 시작한 때 즉 창조된 때로부터 지금까지 존재한다는 뜻일 뿐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그렇다고 그가 하나님은 아니니 사람으로 계시는 분은 아들 외에 없기 때문이다.


영원히 있기는 하나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다" 했으므로 또 "시작한 날"이 없다고 했으니, 이는 이 자연계를 기준으로 한 말로서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처럼 존재하지는 않고 그 존재의 시작은 있다는 의미가 된다. 아비나 어미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 것은, 마치 아비 어미가 있는 것처럼 존재하기 시작한 때는 있되 단지 아비, 어미가 없다는 사실만 강조하는 뉘앙스를 풍기는 대목이다.


그러면 아담은 죄인으로서 죽었는데 어찌 다시 살아나 살 수 있는가. 물론 아담이 다시 살아날 때에는 말할 것도 없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담이 다시 살아나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면 에녹은 산 채로 하늘로 들려져 올라 갔고 엘리야 역시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죽음을 보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에서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라는 이 칭호를 가리켜 "산 자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칭호라고 설명하신 그리스도시다.


그렇다면 아담 역시 지금까지도 살아 있다는 것은 합리적이고(그런 선례가 있으므로) 합법적(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으므로)이다. 문제는 에녹과 엘리야는 그렇게 승천한 후에 다시 세상에 나타난 적이 없는데 아담은 아브라함 당시 세상에 있었다는 사실인데 이는 어떻게 설명되는가 하면 이 역시 아담은 이상 지적한 특징으로서의 유일무이의 존재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아다의 범죄의 특성을 볼 때 여자(나중에 하와라는 이름을 아담이 지어 주었지만)의 범죄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인류의 대표 격으로 죄인으로서의 죽음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강조되는 것이다. 아담은 물론 범죄한 죄인이었다. 그러나 에녹이나 엘리야나 죄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승천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다시 강조하지만 이들 모두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근거로 하여 그렇게 승천도 하고 아담의 경우 세상에도 존재해 있었던 것이다.


아담(남자)의 범죄가 여자와 달랐다는 것은, 아담은 당시 여자와 동일 운명의 선상에 당시 놓여져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아담 자신의 자유 선택에 의해 불복종하고 일면으로는 고의적인 범죄의 유형에 속하기까지 한다. 왜냐면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고도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가차없이 죽음을 맞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도 남자가 꾐을 보지 않고 여자가 속아 넘어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어 그 차이를 내비치고 있음을 보게 된다(딤전 2:14).


즉 둘의 범죄에서 일종의 차별화를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고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뜻으로[딤전 2:12] 한 말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물론 여기서 죄의 경중을 따진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렇지만 아담이 멜기세덱의 이름으로 다시 세상에 등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의 비중은 크다 아니하지 못할 것이다. 그 몸 역시 신령한 몸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태는 아담이 처음 영계인 에덴낙원에 있었던 유일한 존재라는 데에서도 무게가 실린다.


그런 기력(氣力)의 여파로 아담 이후 모든 인류가 노아 홍수 때까지는 천년 가까이 생존할 수 있었다는 점도 참작될 만하다. 하물며 직접 신령한 몸으로 있다가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되돌아온 아담의 경우 얼마든지 그 기력으로 이 세상에서 활동할 수 있었으리라. 기력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활동의 합법성이 인정되어야 하는데 이미 그런 사례는 에녹과 엘리야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는 터이다.


다시 말해 앞에서 남자(아담)와 여자와의 죄의 질적인 차이를 논한 것도 아담이 직접 그 "뱀"의 접근을 받았다면 거기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나 자기와 한 몸으로서의 하나를 이루고 있는 여자가 직접 먹기를 권함에 따른 공동 운명체적인 피할 수 없었던 범죄로서 여러 모로 아담의 특이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논리인 것이다. 결론으로 말해서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의 제사장으로서 활약할 수 있는 타당성을 논하는 것이다.


아담을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표상이라 했듯이 여자는 교회에 해당되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구성할 우리들의 범죄의 대가로서의 죽음에 동참하심으로써 즉 죄인 아닌 죄인의 모습으로(사 53:12) 죄인으로서의 죽음을 죽으신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록자가 멜기세덱에 대한 소개를 하면서 "멜기세덱에 관하여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여러분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렵다"(히 5:11) 한 것은, 아담이 죄인으로서 죽었는데 어찌 그런 명예스러운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겠느냐 하는 점을 말한 것이다.


제사장은 제물이 있어야 하는데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치신 것처럼 아담 역시 영화를 극했던 에덴낙원에서 쫓겨나 거의 천년 동안 세상에서 (자연계에 속한 연약한 육체로서의) 고초를 겪은 것 자체가 그런 제물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 아니었나 감히 생각해보는 것이다. 물론 아담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범죄로 인한 대가로서의 죽음이었음은 변할 수 없다.


그러나 시각을 달리 해서 볼 때, 아담이 그런 제사장 역할을 아무 죄가 없는데도 그렇게 죽음의 고난을 받아 제물로서의 의미를 나타낼 수는 없는 것이니, 오직 그런 역할은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남겨져 있는 성역(聖域)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확대 해석일지 몰라도 그런 것을 상징하여 아담이 범죄에 뛰어들어 여자와 함께 되는 그런 의미가 아닐까 여겨지는 것이다. 물론 아담 자신이 그런 것을 의식하여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였을 리는 없다.


중요한 것은 다음 사실일 것이다. 즉 아담이 사단의 범죄처럼 처음부터 "불의를 좋아해서"(살후 2:12) 그렇게 범죄한 것은 아니리라는 것이다. 앞의 지적대로 여자가 범죄하여 죽음의 운명에 놓인 상황에서 여자와 하나됨을 인하여 어느 면으로 보면 불가항력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인데 외람된 생각일까. 우리로 치면, 육신에 사로잡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 즉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나 육체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롬 7:25)고 설명했던 그런 상태를 연출한 것이 아닐까.


이제 그리스도의 시대인 만큼 오늘날 우리에게 멜기세덱이 지니는 의미는 거의 없다. 따라서 이렇게 해석하든 저렇게 해석하든 관계가 없으나 오직 경계하는 것은, 다른 예에서도 그러하듯이 멜기세덱의 존재를 엉뚱한 데에다 갖다 붙여 우리의 구원의 도리를 왜곡시키기 위해 사단이 "성경 해석"이라는 핑계로 악용하지나 않을까 저어하여 이를 미리 방비하는 계책으로 이런 해석을 시도한 것이니 단지 참고하시기만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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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

(히 8:3) 무릇 대제사장이란 예물과 제물 드림을 위해 세우신 사람이므로 그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하실 것이다. (히 8:4) 예수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않으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따라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다. (히 8:5) 그들이 섬겼던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다.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과 같으니 말씀하시기를,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신 것이다.


(히 8:6)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仲保)이신 까닭이다. (히 8:7) 저 첫 언약이 흠이 없었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히 8:8) 그 처음 것들을 허물하여 이르기를, "'보라! 날이 이를 것이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울 것이다'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한 것이다.


(히 8:9) 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들의 선조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세운 언약과 같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않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하셨고, (히 8:10) 또 말씀하시기를,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될 것이다. (히 8:11)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말하기를 '주님을 알라' 하지 않을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다. (히 8:12) 내가 그들의 불의를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을 것이라" 하셨다. (히 8:13)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니 첫 것은 낡아지는 것이고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가는 것이다.


[註-"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게 만드신다는 것이니 사랑은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되어(롬 5:8) 나타나게 될 것을 미리 말하심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그 모든 말씀에 사랑에서 우러나는 기쁨으로 순종하면 되는 것이니, 왜냐면 그런 확증만 아니라 이제는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모든 믿는 자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베푸심이니 성령으로 계시는 그리스도 친히 그 능력이 되어(행 1:8) 계시기 때문이다].


언약의 피


(히 9:1)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聖所)가 있었다. (히 9:2) 예비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燈臺)와 상(床)과 그 위에 차려놓은 떡이 있었으니 이를 성소(聖所)라 일컬었고 (히 9:3)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至聖所, the holiest of all)라 했는데 (히 9:4) 금 향로(香爐  향을 피우는 작은 화로)와 사면(四面)을 금으로 싼 언약(言約) 궤(櫃, ark)가 있고 그 안에 만나[註-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 아래 광야를 통해 복된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던 나그네 길에서 하늘로부터 과자 같이 생긴 먹을 것이 날마다 내려 와 이스라엘 사람들로 먹게 하셨던 것을 만나라 한다-요 6:49]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註-첫 대제사장이 되었던 인물로 모세의 친형]의 싹이 난[budded] 지팡이[註-대제사장으로서의 아론의 직분에 대해 시기하는 자들이 있어 아론과 다툼이 있을 때 아론이 들고 있던 지팡이에서 싹이 돋게 하심으로써 아론을 택하신 것을 입증하셨던 바로 그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註-모세가 시내 산(Mt. Sinai)에서 십계명을 받았을 때 그 십계명이 새겨졌던 두 돌 판]이 있고, (히 9:5) 그 위에 있는 속죄소(贖罪所, 그 궤의 뚜껑-the atonement cover, mercy seat)를 영광의 '그룹[cherub]'들이 그 날개로 덮고 있는 형상이 만들어져 있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다.


(히 9:6) 이 모든 것이 이 같이 마련되어 있었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禮)를 행하고[예배 의식을 치르고] (히 9: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1년 1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않았으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해 드리는 것이었다.


(히 9:8)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聖所)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히 9: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로서,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물이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었으니 (히 9: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禮法)[또는 의식]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즉 그리스도 오실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다.


(히 9:11) 장차 나타나게 되어 있었던 그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손으로 짓지 않은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않은 더 크고 온전한 장막[註-"첫 장막"(히 9:8)에 대비되는]으로 말미암아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써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贖罪)를 이루셔서 단번에 성소(聖所)에 들어가신 것이다.


(히 9:13) [과거 모세 시대에]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ashes]로 부정한 자[the unclean]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했거든 (히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죽은 행실로부터 여러분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겠는가.


(롬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첫 언약 때 범한 죄 속하려고 죽으심


(롬 3:25) 이 예수님을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看過, to pass over: 註-이스라엘의 첫 유월절 당시 이집트의 모든 장자들에게 죽음의 재앙을 내리던 천사가 이스라엘의 장자만은 지나쳐 (문설주와 인방에 발린 어린 양의 피를 보고) 지나갔던 즉 그냥 통과해 넘어갔던 바로 그 단어요 용어이니 그래서 영역으로는 유월절을 "the Passover"라 한다)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옳으심, righteousness]을 나타내려 하심인 바 (롬 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올바르심, righteousness]을 나타내셔서 자기도 의로우시고[올바르시고, to be just] 또한 예수님을 믿는 이를 의롭게[올바르게, to justify] 하려 하심이다.


(히 9:15)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仲保-mediator, 중재자, 조정인)이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贖, 贖罪)하려고 죽으셔서,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하나님의] 상속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히 9:16)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니 (히 9:17)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해지므로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어느 때든 효력이 없다. [註-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나타나는 "효력'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히 9:18)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히 9:19)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그리고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9牛膝草, hyssop: 註-부정[不淨]을 없애는데 그 가지[枝]를 썼던 것으로 100~120 cm의 갈대와 같은 줄기로 되어 있음. 피 흘리시는 희생 양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께 같은 의미가 적용되어 있음-요 19:29)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 책과 온 백성에게 뿌리며 (히 9:20) 말하기를, "이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히 9:21)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린 것이다.


[註-이렇게 모세가 그 피를 백성들 위에 뿌리기 이전에 모세는 하나님의 율법을 기록한 책을 모든 백성에게 읽어 들렸고 이 때 백성들은 그 말씀대로 행하고 복종하겠습니다 하고 큰 소리로 외친 것이니(출 24:7), 우리에게 주시는 새 언약 즉 구원 얻음도 필수, 필연적으로 복종과 직결되어 있는 바 믿음의 본질이 이 복종에 있기 때문이다].


(히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것이 피로써 정결케 되니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용서가 없는 것이다. (히 13:20) 양의 큰 목자(牧者)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께서 (히 13:21) 모든 선한 일에 여러분을 온전케 하셔서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기뻐하시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록 있으시기를. 아멘. [중복]


제물


(히 9: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模型)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모형이 아닌 실체]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곧 그리스도]을 요하는 것이다. (히 9: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聖所)에 들어가지 않으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셔서 이제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히 9:25) 대제사장[여러 제사장이 대표 격]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聖所)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 아니 하셨으니 (히 9:26) 그리하면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하시는 것이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祭物)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신 것이다.


[註-"세상 끝"이라 함은 우리가 세운 기준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안목에서 설정된 것이니, 하나님의 기준으로 하면, 그리스도 오시기 전을 "세상 끝 이전"이라 하고 오신 때를 "세상 끝"이라 하여 그 이후를 "세상 끝 이후"라 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세상의 상태를 재시고 저울질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일정 세월을 균일하게 시간상으로만 3등분하여, 그 첫째 것을 시작 또는 초창기, 그 마지막 것을 말기 즉 끝이라 규정하므로 이를 알지 못하면 헷갈리기 쉽다].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롬 3:24)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다.


(롬 3: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다. 무슨 법으로 또는 행위로써인가? 아니다. 오직 믿음의 법으로써다. (롬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한다.


[註-"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다"는 것은 그리스도 없이 율법의 행위로만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는 것을 말한다. 이제 일단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면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 곧 "율법의 완성"(롬 13:10), "율법을 온전케 함"(마 5:17), "율법을 이룸"(갈 5:14/롬 13:8), "율법을 굳게 세움"(롬 3:31)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중도에 그 마음이 변하여 과거처럼 여전히 자기를 위해 살면 어떻게 되는가, 이럴 경우 믿음을 배신(배반)함이 되어 (딤전 5:11,12) 심판을 받는다(:12)].


(롬 3:29)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만의 하나님이시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 (롬 3: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롬 3: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냐? 그럴 수 없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운다.


(롬 4: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할 수 있는가 하면, (롬 4: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는 것이다. (롬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이 그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다"고 한 것이다.


[註-"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 2:21)라 말하고 있는 야고보서와 이 로마서의 차이는, 그리스도 없이 율법을 행하는 것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바울이 말한 뜻이다. 반면에 야고보는 "믿음이 그 행함과 함께 역사(役事)되고 따라서 행함으로써야 믿음이 온전케 되어 제대로 된 믿음이 됨"(:22]을 역설함이다. 야고보 역시 바울의 견해와 같고 바울 역시 야고보의 주장에 백 프로 동조하는 것을 그 편지에서 우리는 확인하는 것이다].


(롬 4:4) 일하는 자[율법대로 지켜 행한 자]에게는 그 삯[대가]을 은혜로 여기지 않고 빚[일한 만큼의 보수를 지불해야 하므로]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일을 하지 않았을지라도 경건치 않은 자[죄인]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것이니, (롬 4: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福)에 대하여 다윗이 말하기를, (롬 4:7) "그 불법을 용서하심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8) 주님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않으실 사람은 복이 있다" 함과 같다.


(롬 4:9) 그런즉 이 복[의롭다 하심을 받아 복 받은 상태]이 할례자에게냐, 아니면 무(無) 할례자(割禮者)에게도 그러하냐? 대개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한다. (롬 4:10) 그런즉 어떻게 그렇게 여기셨느냐? 할례(circumcision) 때냐, 무할례 때냐. 할례 때가 아니라 무(無) 할례 때이다. (롬 4:11) 그가 할례의 표[sign]를 받은 것은 무할례 때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印)친 것이니, 이는 무(無) 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로 의(義)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롬 4:12) 또한 할례자의 조상도 되므로 [그런] 할례 받을 자만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 때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곧 이스라엘(즉 유대인)에 대립되는 이방인]에게 그러하다.


(롬 4: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後嗣-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하신 언약(言約)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다. (롬 4: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해질 수밖에 없다.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롬 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딤후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셔서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다.[註-즉 우리를 미리 아심으로써 미리 택하심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나, 우리 스스로를 가리켜 우리가 택함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고 오직 그 대신 우리로서는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벧후 1:10) 것밖에 없으니 택하심에 대한 증거를 나타내는 것은 순수히 우리 몫이기 때문이다. 물론 능력은 순전히 그리스도의 것이나 우리 자신의 믿음의 의지 없이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 단독으로는 아무 효험도 거둘 수 없는 까닭이다].


(딤후 1: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드러난 것인바 그가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않을 것을 드러내셨으니 (엡 3: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하고[자유롭고] 자신 있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엡 2:8) 여러분이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으니 이것이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다. (엡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다. (롬 6:23) 죄의 대가(代價)는 사망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 안에 있는 영생이다[중복].


토기장[土器匠]이가 진흙 한 덩이로


(롬 9: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하나님께서 불의하시느냐[옳지 못하시냐]? 그럴 수 없다. (롬 9:15)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길 것이라" 하셨으니 (롬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다. 


(롬 9:17) 성경에서 [모세 당시 이집트의] '바로' 왕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해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롬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팍하게 만드시는 것이다.

(롬 9: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할 것이니 (롬 9: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 같이 만들었느냐?'고 말하겠는가? (롬 9:21) 토기장(土器匠)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드는 권리가 없느냐? [註-여기서 하나님의 이러한 택하심은 앞서의 설명대로 미리 보시고 아심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유념할 일이다. 다시 말해 이집트 왕 '바로(Pharaoh)'로 말하면 그가 자기의 자유 의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위인이 아닌 것을 이를 미리 아셨으므로 당시 그런 사건을 위해 그를 택하여 세우신 것이다].


(롬 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셔서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예를 들면 바로 왕과 같은]을 오래 참으심으로 인내하시고, (롬 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유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하리요.


(롬 9:24) 후자에 속한 그릇이 곧 우리이니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이다. (롬 9:25)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않은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를 것이다. (롬 9: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다" 함과 같다. (롬 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기를,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 얻을 것이니 (롬 9:28) 주님이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셔서 지체하시지 않고 끝내실 것이라" 하셨다.


(롬 9: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전능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않았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 같았을 것이다" 함과 같다. (롬 9: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이상의 예언과 같이] 의(義)를 따르지 않은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롬 9:31)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의에 이르지 못했다.


(롬 9:32)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다. 부딪힐 돌에 부딪힌 것이다. (롬 9: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함과 같다.


(롬 10:1) 형제들,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다. (롬 10:2) 내가 증언하거니와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다. (롬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았다.


그리스도의 형상 이루기까지 다시 해산의 수고


(갈 4:19) 나의 자녀들이여,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여러분을 위해 해산하는 수고를 하니 (갈 4:20) 내가 이제라도 여러분과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여러분을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다. (갈 4: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이들이여, 율법을 듣지 못했느냐? (갈 4: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의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인(自由人) 여자에게서 났다" 했는데, (갈 4: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인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왜냐면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어 가고 그 아내도 나이 많아 자식 낳기를 단념했던 차에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삭이 출생했기 때문] 말미암았다.


(갈 4:24) 이것은 비유로서,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을 상징함]이니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로서 곧 하가다. (갈 4: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Mt. Sinai]을 대표하는 것으로 지금의 예루살렘과 대칭되는 곳이니 하가는 그 자녀들로 더불어 [아브라함에게] 종들이었으나[종의 신분으로 낳은 자식들이므로], (갈 4:26) 오직 위에 있는[즉 종에 대칭되는 주인 격으로서의] 예루살렘을 대표하는 이는 자유인이니 곧 우리의 어머니[아브라함이 아버지 즉 조상이므로]인 것이다.


(갈 4:27)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産苦)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다" 했으니 (갈 4:28) 형제들, 여러분은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다. (갈 4: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이스마엘]가 성령을 따라 난 자[이삭]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렇게 한다.


(갈 4: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인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상속 받지 못할 것이다" 했다. (갈 4:31) 그런즉 형제들,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인 여자의 자녀다. (갈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 5:2) 보라! 나 바울이 여러분에게 말한다. 여러분이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다. (갈 5: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니, 그는 율법[그들은 할례만을 유독 고집하지만]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다. (갈 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여러분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다[중복].


[註-결국 이상의 여러 설명은, 그리스도도 믿고 할례도 함께 받아야 구원된다고 주장하며 당시 교회를 어지럽게 하던 일부 유대주의자들에 현혹되어 있는 이들을 위한 모세 율법 차원에서의 그리스도 복음의 해설인 것이다. 당시 사정을 감안하여 읽을 부분이므로 덩달아 우리가 여기에 힘들여 강조할 필요가 없고 무시해도 좋은 것이다. 이를 마치 율법(모세의 계율이 아닌 하나님의 율법 또는 삶의 기본 계명)을 일절 행하지 행하지 않아도 구원을 받게 되어 있다는 식으로 악용하고 있으므로 주의를 요한다].


핍박을 면하려 함뿐


(갈 5:10) 나는 여러분이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않을 줄을 주님 안에서 확신한다. 그러나 여러분을 요동케 하는 이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을 것이다. (갈 5:11) 형제들,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 했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을 것이다. (갈 5:12) 여러분을 어지럽게 하는 자들 스스로 '그것'을 완전히 잘라 버림이 차라리 낫지 않으랴[註-할례 즉 포피(包皮) 베는 일을 두고 그렇게 승강이를 벌일 바에야 아주 그것을 절단해 버림 즉 거세(去勢)함이 어떠냐 하는 뜻].


(갈 6:11) 내 손으로 여러분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갈 6: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여러분들로 할례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다. (갈 6:13) 할례 받은 그들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않고 여러분들로 할례 받게 하려는 것은, 그들의 충동[혹은 교사(敎唆)로]으로 여러분이 할례 받았다는 것 자체를 자랑하게 하려 함뿐이다.


바울 자신에 대한 해명


(고전 15: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다.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이다.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 은혜가 헛되지 않아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다.


(딤전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게 여기셔서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딤전 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난폭한 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않을 때에 알지 못하고 행했음이다. (딤전 1:14)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우리 주님의 은혜가 넘치도록 풍성하셨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

(딤전 1:15) 진실되고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함이니,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다. (딤전 1: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셔서 후에 주님을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


(갈 1: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여러분이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박멸하려 했고 (갈 1:14) 내 동족 중 여러 내 나이또래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과 관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갈 1: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갈 1:16)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도록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flesh and blood]과 의논하지 않고 (갈 1: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이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다.


아라비아에서 3년


(갈 1:18) 그 후 3년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15일을 유할 때 (갈 1:19) 주님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했다. (갈 1:20) 보라!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다. (갈 1:21) 그 후에 내가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갈 1:2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갈 1:23)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박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갈 1:24)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 것이다.


(갈 2:1) 14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 갔으니 (갈 2:2)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알리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註-"달음질"은 복음활동을 그렇게 표현한 것]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었다. [註-사사로이 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했을 경우 교회 내의 유대주의자들과의 불필요한 마찰이 있음으로 해서 지금까지의 복음 활동의 결실에 악영향을 줄 수도 있으므로]. (갈 2: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않았으니 [註-할례 문제에 대해 매우 극성스럽게 문제를 일으켰던 당시 상황을 이로써 짐작할 수 있다].


(고전 15:11) 그러므로 내나 그들이나 이 같이 전파하니 여러분도 이 같이 믿었다. (빌 3: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 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할 것이니 (빌 3:5) 내가 8일만에 할례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派) 사람이요 (빌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義)로는 흠이 없는 자이다.


(고후 11:22) 그들이 히브리 사람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고후 11: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다. (고후 11: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할 것이다. (고후 11:31) 주 예수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 받으실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않는 줄을 아신다. (고후 11:32) 다메섹에서 아레다왕(王) 관헌(官憲)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城)을 지킬 때 (고후 11:33)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 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다.


(고후 12: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면 주님의 환상과 계시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고후 12: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註-바울 자기 자신을 가리킴] 아는데 14년 전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다{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신다}. (고후 12:3) 내가 아는 이 사람이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신다} (고후 12:4)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형용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었다. (고후 12: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해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해서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않을 것이다. (고후 12: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해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을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다.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대해 지나친 생각을 할까 하여 그만 둔다.


(고후 10:1) 여러분을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엄정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여러분을 권하고 (고후 10:2) 또한 우리를 육체대로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을 대하여 내가 엄정히 대하려는 것 같이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도 이 엄정한 태도로 임하지 않도록 해주기를 원한다.


(고후 10:7) 여러분은 외모만 보고 있다. 만일 누구든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일이다. (고후 10:8) 주님께서 주신 권세는 여러분을 무너뜨리려 하심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심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않다.


(고후 10:9) 이는 여러분을 놀라게 할 목적으로 내가 편지하는 것처럼 생각치 않기를 바라는 바, (고후 10:10) 그들의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 (고후 10:11) 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자가 어떤 자이면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자도 그와 같은 자인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고후 10:12) 우리가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이들로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다. (고후 10:13) 그러나 우리는 분량 밖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량으로 나눠 주신 그 분량의 한계를 따라 함으로써 여러분에게까지 이른 것이다.

(고후 10:14) 우리가 여러분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여러분에게까지 이른 것이다. (고후 10:15) 우리는 남의 수고를 틈 타 한도 밖의 것으로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여러분의 믿음이 더할수록 우리의 분수를 따라 여러분 가운데서 더욱 창대해지기를 바란다. (고후 10:16) 이는 다른 전도자의 영역 안에서 그들이 닦아놓은 것으로 자랑하지 않고 여러분 지역을 넘어서 까지도 얼마든지 복음을 전하려 함이다.


(고후 11:5)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 생각한다. (고후 11:6) 내가 비록 말에는 졸렬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않으니 이를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나타내었다. (고후 11:7) 내가 여러분을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 없이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고후 11:8) 내가 여러분을 섬기기 위해 다른 여러 교회에서 보조금을 받은 것이 그들로부터 탈취한 것이냐?


(고후 11:9) 또 내가 여러분에게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함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했음이다. 내가 모든 일에 여러분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조심했거니와 앞으로도 조심할 것이다. (고후 11:10)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 아가야 지방에서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않을 것이다. (고후 11:11) 어떤 연고냐. 내가 여러분을 사랑하지 아니함이냐? 하나님이 아신다. (고후 11:12) 내가 하는 것을 계속할 것이니, 기회를 엿보는 자들의 그 기회를 끊어 버려 그들로 하여금 그 자랑하는 일에 대하여 우리처럼 되기를 바랄 뿐이다.


(고후 11:16) 내가 다시 말하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나로 조금 자랑하게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고후 11:17) 내가 말하는 것은 주님을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 없이 자랑한다. (고후 11:18) 여러 사람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다. (고후 11:19) 여러분은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고후 11:20) 누가 여러분들을 종으로 삼거나 잡아 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기를 스스로 높여 여러분의 뺨을 칠지라도 여러분이 용납한다. (고후 11:21) 우리가 약한 것 같이 내가 욕되게 말한다.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지만 나도 담대하겠다.


[註-"조금 자랑하게 어리석은 자로 나를 받으라", "내가 말하는 것은 주님을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 없이 자랑한다", "여러 사람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다", "누가 여러분들을 잡아 먹거나, 운운" 등의 '막말'을 하는 바울이 아니건만 이런 말을 사용하는 것을 볼 때 교회에 대한 바울 사도의 열심과 충정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는 하지만, 바울 생전에도 얼마나 많은 사이비들이 발호하여 바울을 이 정도로까지 격동했는지 그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다 하겠다. 하물며 오늘이랴. 오늘날의 극도에 이른 혼란과 혼돈을 이상히 여길 것이 없다는 얘기다. 사단이 있는 곳이요 지배하는 때이니 오직 각자는 이런 모든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조심하여"(고전 10:12) 넘어지지 않도록 할 일이다].


(고후 5:12) 우리가 다시 여러분에게 자천(自薦)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에 관해 자랑할 기회를 여러분에게 주어, [참된] 심령으로 하지 않고 외양(外樣)으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처하게 하려는 것이다. (고후 5: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여러분을 위한 것이니

(고후 12:11)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여러분이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여러분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고후 12:12)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여러분 가운데서 모든 참음[all perseverance]과 표적[signs]과 기적[wonders]과 능력[mighty deeds]을 행한 것이다. (고후 12:13) 내 자신이 여러분에게 폐를 끼치지 않은 일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냐? 여러분은 나의 이 공평치 못한 것을 용서하라.


(고후 12:14) 보라, 이제 세 번째 여러분에게 가기를 준비했지만 여러분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것이다. 나의 구하는 것은 여러분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여러분이다.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해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해서 한다. (고후 12:15) 내가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할 것이니 여러분을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


(고후 12:16)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여러분에게 짐을 지우지는 않았을지라도 간사한 자가 되어 책략으로 여러분을 장악했다 하니 (고후 12:17) 내가 여러분에게 보낸 이들 중 누구로 여러분의 이(利)[to take advantage of you]를 취하더냐. (고후 12:18)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여러분의 이를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않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않더냐.


(고후 7:2)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았고 아무든 해롭게 하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다. (고후 7:3) 이는 단죄(斷罪)의 말이 아니라, 이전에도 말했거니와 여러분들로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고자 함이다.


(고후 8:23)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료요 여러분을 위한 나의 동역자요[my partner and fellow-helper],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使者)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다. (고후 8:24)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 교회 앞에서 여러분의 사랑과 여러분을 대한 우리 자랑의 증거를 보이라.


(몬 1:9)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갇힌[복음 활동으로 인하여 구금되어-註] 자 되어 (몬 1: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전도해서 믿게 만든-註] 오네시모를 위해 네게 간곡히 바란다. (몬 1:11)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했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몬 1:12) 네게 그를 돌려 보내니 그는 내 심복이다. (몬 1:13) 그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활동]을 위해 갇힌 중에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한다.


(몬 1:15)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몬 1:16) 이 후로는 종과 같이 하지 않고 종에서 뛰어나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사람이다.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님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몬 1:17)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료[partner]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몬 1:18)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했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그것을 나에게로 셈하라.


(딤후 1: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다. (딤후 1:16) 원컨대 주님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기를. 그가 나를 자주 유쾌하게 해주었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않고 (딤후 1:17)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다. (딤후 1:18) {원컨대 그 날에 주님께서 그로 하여금 주님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시기를!} 또 그가 에베소에서 얼마만큼 나를 섬긴 것을 네가 잘 안다. [註-전에 충성하던 이들이 지금은 배신한 상태에 있는 현실에 대한 비애를 우리도 함께 느낄 수 있다. 이와 같이 얼마든지 믿음에서 떨어질 수 있다].


(고후 12:19) 이 때까지 여러분에게 우리 자신을 변명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말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모든 것은 여러분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다.


고별 인사, 개별적인 문안


(롬 15:22) 그러므로 또한 내가 여러분에게 가려던 것이 여러 번 막혔으나 (롬 15:23)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스페인으로 갈 때에 여러분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롬 15: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여러분을 보고 먼저 여러분과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여러분의 그리로 보내 줌을 바람이다. (롬 15:25) 그러나 이제는 내가 거룩한 형제들을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니 (롬 15:26)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거룩한 형제들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해 기쁘게 얼마를 분담[재정적으로]했음이다. (롬 15:27) 그들이 기뻐서 했거니와, 또한 그들[후자]에게 빚진 자니, 이방인들[전자]이 그들[후자]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후자]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 (롬 15:28)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여러분을 거쳐 스페인으로 갈 것이다. (롬 15:29) 내가 여러분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안다.


(롬 15:33) 평강의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든 이와 함께 계시기를. 아멘. (롬 16:1)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여러분에게 소개하니 (롬 16:2) 거룩한 형제들의 합당한 예절로 여러분이 주님 안에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 것이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다. 나의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다. (롬 16:6) 여러분을 위해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롬 16:7)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 사이에 유명해졌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이다.


(롬 16:8) 또 주님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 (롬 16:9)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롬 16:10)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일가(一家)에게 문안하라. (롬 16:11) 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나깃수의 일가 중 주님 안에 있는 이들에게 문안하라. (롬 16:12) 주님 안에서 많이 수고하는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롬 16:13) 주님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다.


(롬 16:14) 아순그리도, 블레곤, 허메, 바드로바 및 허마와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롬 16:15) 빌롤로고, 율리아, 또 네레오와 그 자매, 올름바와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거룩한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롬 16:16) 여러분이 거룩하게 입 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여러분에게 문안한다. (롬 16:21) [생략].


(고전 16:8)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고전 16:9) 크고 보람있는 일을 할 문이 내게 열려 있고 대적하는 자도 많음이다. (고전 16:10) 디모데가 오거든 여러분은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 없이 여러분 가운데 있게 하라. 그 역시 나와 같이 주님의 일을 힘쓰는 사람이다. (고전 16:11)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그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고전 16:12)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형제들과 함께 여러분에게 가라고 내가 그에게 많이 권하되 지금은 갈 뜻이 일절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갈 것이다.


(고전 16:15) 형제들, 스데바나의 집은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거룩한 형제들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여러분이 아는 고로 내가 여러분을 권하니 (고전 16:16) 이 같은 이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이들에게 복종하라. (고전 16:17)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온 것을 기뻐하니 그들이 여러분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다. (고전 16:18) 그들이 나와 여러분의 마음을 시원케 했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런 이들을 알아 주라. (고전 16:23)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고전 16:24)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과 함께 있다. 거룩하게 입 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고후 13:12) 모든 거룩한 형제들이 여러분에게 문안한다.


(갈 6:18) 형제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에 있으시기를. 아멘


(엡 6:21)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여러분에게도 알게 하려 하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님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여러분에게 알게 할 것이다. (엡 6:22)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또 여러분의 마음을 위로하도록 내가 특별히 그를 여러분에게 보내었다.

(빌 4: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주님 안에 서라. (빌 4: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니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빌 4: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사람인 네게 구하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婦女)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의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 책에 있다


(빌 4:21)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거룩한 형제들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여러분에게 문안하고 (빌 4:22) 모든 거룩한 형제들이 여러분에게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Caesar) 가문(家門)의 몇 사람이다. (빌 4:23)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에 있으시기를.


(골 4:7)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여러분에게 알게 할 것이니 그는 사랑을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님 안에서 함께 된 종이다. (골 4:8) 내가 그를 특별히 여러분에게 보낸 것은 여러분들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여러분의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다. (골 4:9)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니 그는 여러분에게서 온 사람이다. 그들이 여기 일을 다 여러분에게 알게 할 것이다. (골 4: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여러분이 명을 받았으니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골 4:11)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여러분에게 문안하니 그들은 할례파이다.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함께 일하는 이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다.


(골 4:12) 여러분에게서 온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 에바브라가 여러분에게 문안하니 그가 항상 여러분을 위해 애써 기도하여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여러분들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니 (골 4:13) 그가 여러분과 라오디게아에 있는 이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이들을 위해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언한다. (골 4:17) 아킵보에게 말하여 주님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골 4:18)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니 나의 매인[구금된]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으시기를.


(살전 5:26) 거룩하게 입 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 (살전 5:27) 내가 주님을 힘입어 여러분을 명하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 (살전 5:28)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으시기를.


(살후 3:16) 평강의 주님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여러분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주님께서 여러분 모든 이와 함께 하시기를 원한다. (살후 3:17)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니 이는 편지마다 표징이기로 이렇게 쓴다. (살후 3:18)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으시기를.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딤후 4: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다.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다. (딤후 4:12)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다. (딤후 4:13)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딤후 4:14) 구리 제품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니 주님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실 것이니 (딤후 4:15) 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했다.


(딤후 4:19)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딤후 4:20)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렀고 드로비모는 병듦으로 밀레도에 두었으니 (딤후 4:21)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한다. (딤후 4:22) 주님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내가 바라니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있으시기를.


(딛 3:12) 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네게 보낼 것이니 그 때에 네가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 내가 거기서 겨울을 보내기로 작정했다. (딛 3:13) 법리사(法理士) 세나와 및 아볼로를 급히 먼저 보내어 그들로 궁핍함이 없게 하고 (딛 3:14) 또 우리 형제들도 좋은 일에 종사하여 필요한 대로 공급함으로써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도록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 (딛 3:15) 나와 함께 있는 이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으시기를.


(몬 1:19) 나 바울이 이렇게 친필로 쓰지만 내가 갚으려니와, 네 자신 내게 갚아야 할 것이 있는데 이는 내가 말하지 아니한다. (몬 1:20) 오 형제여! 나로 주님 안에서 너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몬 1:21)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으니 네가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안다. (몬 1:23)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된 에바브아와 (몬 1:24) 또한 나의 동역자인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한다. (몬 1:25)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과 함께 하시기를.


(히 13:22) 형제들, 내가 여러분을 권하니 이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여러분에게 썼다. (히 13:23)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여러분이 안다.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여러분을 볼 것이다. (히 13:24) 여러분을 인도하는 이들과 및 모든 거룩한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이들도 여러분에게 문안한다. (히 13:25) 은혜가 여러분 모든 사람에게 있으시기를.


(벧전 5:12)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여러분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니 여러분은 이 은혜에 굳게 서라. (벧전 5:13)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여러분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한다. (벧전 5:14) 여러분은 사랑의 입 맞춤으로 피차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기를.


(요이 1:12) 내가 여러분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치 않고 오히려 여러분에게 가서 면대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여러분의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다. (요이 1:13) 택하심을 입은 너의 자매[sister]의 자녀들이 네게 문안한다.


(요삼 1:12)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도 증거를 받았고 우리도 증언하니 너는 우리의 증거가 참된 줄을 알 것이다. (요삼 1:13) 내가 네게 쓸 것이 많으나 먹과 붓으로 쓰기를 원치 않고 (요삼 1:14) 속히 보기를 바라니 또한 우리가 면대해서 말할 것이다. (요삼 1:15) 평강이 네게 있기를. 여러 친구가 네게 문안한다. 너는 각 친구 이름으로 문안하라.

기타

(요삼 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한다. (요삼 1:3)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기를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쁘다. (요삼 1:4)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한 즐거움이 없다.


(딤전 5:23)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고후 7:12) 그런즉 내가 여러분에게 쓴 것은 그 불의 행한 이를 인한 것도 그 불의 당한 이를 인한 것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의 여러분을 위한 우리의 간절함을 여러분 스스로 알도록 하려 함이었다. (고후 7:13) 이로 인하여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의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여러분들로 인하여 안심하게 되었음이다. (고후 7:14) 내가 그에게 여러분을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않으니, 우리가 여러분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 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가 자랑한 것도 참된 것이기 때문이다. (고후 7:16) 내가 여러분들에 관하여 매사 자신을 갖게 되니 기쁘다.


(고후 1:23)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거니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않은 것은 여러분을 아끼려 함이다. (고후 1:24) 우리가 여러분의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여러분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여러분이 믿음에 섰음이다.

하나님의 영으로 쓴 편지

(고후 3:1) 우리가 다시 자천(自薦-스스로를 추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어찌 우리가 어떤 사람처럼 자신의 소개장을 여러분에게 부치거나 맡기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고후 3:2) 여러분이 우리의 편지이니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다. (고후 3:3) 여러분은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石碑]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心碑)에 한 것이다. (고후 3:4)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 같은 확신이 있는 바 (고후 3: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나는 것이다.


예수님의 흔적


(갈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님의 흔적을 가졌다.


(빌 1:25) 내가 살 것과 여러분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 여러분과 함께 거(居)할[to remain and continue] 이것을 확실히 아는 것이니 (빌 1:26) 내가 다시 여러분과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의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다.

(고전 4:7) 누가 여러분을 [남보다 더 낫다고] 구별했느냐? 여러분에게 있는 것 중에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아닌 것이 어디 있느냐. 여러분이 그것을 선물로 받았은즉 어찌하여 하나님의 선물이 아닌 자기 스스로 난 것처럼 자랑하느냐? (고전 4:8) 여러분이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유하였다. 우리 없이 왕 노릇했다. 물론 우리는 여러분이 왕 노릇하는 것을 원하니 이는 여러분이 우리와 함께 왕 노릇하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註-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왕 노릇하기를 바란다는 뜻이니 이런 속된 것으로써 우쭐해져 세상적으로 왕 노릇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는 것으로서, 이 두 구절은 고린도 교회의 교만을 질책한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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