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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28일 일요일

인생 항로(航路)의 폴라리스(북극성) ㅡ 한 간증자의 동영상


각종 사이비 간증들이 난무하는 때가 되어 간증을 듣는 편이 아니나
불교 신자로서 믿음에 들어 온 계기 그리고 죽음의 실상에 대한
많은 것을 시사하므로 여기 기꺼이 소개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간증자에 대해 전연 아는 바가 없습니다. 





주기도문
















행복하게 사는 최고 지선의 방법은 나는 너를 위하고 너는 나를 위함으로써 그 누구도 자기를 위하지 않는 데에 있다. 이것이 사람 사는 법이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공동체 의식이다. 그러나 사람마다 이런 약속을 할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몇몇 극소수에 한하여 남들이야 어찌 하든 나만은 그런 사람 사는 도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할 뿐 대부분은 범인들로서 대세를 따라 남 따라 나도 하는 식으로 나갈 뿐이지 공동체 의식을 앞세우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만은 그렇게 하리라는 일관된 사상으로 나가는 사람을 우리는 대개 의인이라 불러주는데 그런 공동체 의식이 일구어낸 공적이 많지도 않거니와 사례를 들기도 힘들기는 하지만(대개 음지에서 그리고 남 모르게 진행되므로), 참으로 희귀한 역사적 사례로 우리는 항상 임진란의 이공 순신을 예로 드는 것이다. 사례가 드문 것은 이공과 같이 전쟁과 결부되어 나타나는 예가 좀처럼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데에는 서로 약속이 있어야 하고 그 약속을 철저히 지켜야 완벽한 이상향 구현이 되는데 서로 믿을 수 있느냐가 관건으로서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는 이를 부정적으로 증명한다. 남이야 이행하든 않든 나만은 그것이 옳은 일이므로 지키겠다는 사람이 혹 가뭄에 콩 나듯이 나지만 대체적으로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 사회가 아담 이후 3운법칙과 같은 강제 수단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것이다.

정글의 맹수와 같은 자아중심의 인생들이요 또 그런 인간 세상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잘도 굴러간다 하겠지만 모르는 소리다. 인력으로 잘 안된다는 말들을 많이 하기는 하지만 그 실체는 알지 못했다. 하나님의 섭리라고 혹 말하는 이는 있지만 그저 막연하여 바람 잡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 막연하던 실체가 현실의 무대에 등장한 것이다. 이제 그 비밀 혹은 실체의 하나가 드러난 것이니 곧 3운(三運)법칙이다.

한 사람 한 사람 개개인의 삶을 옭아매어 옥죔으로써 한 치 빈 틈 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와 같은 구조이다. 우주의 신비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이 많은 인생들의 삶이 차질없이 운영되어 나가는 이 바로 '인간 우주'가 아니고 무엇인가. 우주 천체보다 더 정밀하다고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고로 한꺼번에 몰살하는 돌발사태나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개개인으로 보아서는 반드시 세 가지 유형에 한정해서 죽을 때가 되어서 죽는 것이다.

때가 되어 죽으니 그러면 살인자에게 통하는 변명인가. 그렇지는 않다. 때가 되어 자기가 손을 대지 않아도 죽을 것을 자기 손이 일부러 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중죄가 성립됨이 당연하다. 차라리 가만 있었다면 자기는 연루되지 않았을 것이다. 고로 천하의 살인귀들은 이 점 명심하여 한없이 어리석은 일을 하지 말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사 세상사가 물고 물리는 악순환이든 선순환이든 돌고 돌아드는 것이니 이 광경만 상상해도 절대자의 위엄 앞에서 심장이 멎어질 지경이다.

삶은 한 몸 체제에서 사는 것이므로 머리 몸 관계인즉 각 지체는 머리와 개별적으로 약속을 하는 것. 신체 중 각 지체가 신경 세포에 의해 머리와 연락이 맞닿아 있어 직접 지령을 받들어 움직이는 것이다. 인간 등 인격적 존재로서 지, 정, 의가 분명한 피조물은 머리이신 창조자 하나님과 직접 약속을 하는 것이다. 새 창조에서 회개가 바로 그 약속이고 이 약속을 액면대로 받아주시는 것이 성령 주심 곧 우리의 구원이다.

그래서 현재 내가 영생이신 주님을 개인적으로 소유하여 영생하는 자가 되어 있어 영생이 있지만(성경에서 말하는 "생명"이 그것이다ㅡ요일 5:12) 동시에 성경은 천명하기를 "영생의 약속"(요일 2:25)이라 했다. 왜냐면 순종하기롤 약속하고 현재 구원되어 영생을 소유하고 있지마는, 이 약속을 잘 이행하는지 여부에 따라 또한 최종 결판이 나는 까닭에 영생이 약속임을 성경이 강조하고 있음은 당연하다(히 4:1/6:17/10:23,36/약 1:12/2:5/벧후 4:1/요일 2:25).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이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저들 가운데 거하며(살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들의 하나님이 되고 저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하셨으니...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이여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 6:16-7:1) 함과 같다.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자"는 설교를 과연 오늘날까지 강단에서 몇 번 들었던가.

내가 지금 양자가 되어 있어 "아바, 아버지"(갈 4:6)라 하지만 동시에 이 또한 약속인 것이다. 왜냐면 내가 도중에 마음이 변하여 끝까지 나의 약속을 수행하지 않음을 인하여 파기되면 파양(罷養)이 되는 것이다. 육체로 난 자연계에서의 부모 자식 관계는 양자 아닌 친 자식일 경우 말인즉 부자 인연을 끊는다 해도 자식은 엄연한 자식이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우리가 양자 관계에 있음이니 양자 곧 아들로서의 본분을 다하는지의 여부를 묻게 됨은 당연하다.

이와 같이 강제력에 의해 겨우 지탱되어 가는 세상이 한시적임은 마땅하다. 또 이런 세상일수록 자기 생명을 미워해야 하는데 도리어 사랑하여 영원한 세상의 생명과 맞바꾸려 하다니 이를 어찌 설명해야 좋을 것인가. 인간은 죽음의 실상을 너무나 모르고 지낸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죽을 임시에 가서 죽음의 실상을 뒤늦게야 알고 결사적으로 몸부림치다가 숨이 넘어가는 사례가 너무 흔하다고 한다. 사탄이 이제까지 씌워놓은 죽음의 안대(眼帶)가 겨우 벗겨지는 순간 죽음의 실상을 보게 되나 보는 그 순간 이미 죽음은 인정사정 없이 낚아채 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죽음의 실상은 살아생전에 미처 보지 못하더라도 사람들이 무조건 신뢰하는 과학에서 그 최고 영역에 속하는 3위1체의 원리에 의한 초자연계 실상만은 인지하도록 3운법칙을 알리신 것이건만 사망의 깊은 잠에 곯아 떨어진 인생들이 과연 얼마만큼 이 소리에 소스라쳐 깰 것인가. 술에 대취하면 인사불성이다. 세상 술에 취해도 보통 취한 상황이 아니다. 19세기 사해 근처에서 발견된 양피지에 4복음서와 똑같은 내용의 글이 적혀 있는데 그 중 색다른 것 중의 하나가 예수님의 말씀으로서 "내가 세상 한복판에 와서 둘러보니 모두가 세상 술에 만취돼 있어 이를 슬퍼한다"는 대목이 있다고 한다.

그런 말씀을 듣지 않아도 오늘날은 사람 잡는 사람 홀리는 세상의 그 기세가 더욱 왕성하여 심하게 말하면 밥먹는 시간만 빼고는 잠잘 시간도 없이 눈은 컴퓨터, 스마트폰 화면에 꽂혀져 있을 정도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처하는 데에도 좀더 자극적이고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3운법칙에 의해 검증되는 3위1체 원리 곧 만유 창조의 법칙, 만유 존속의 법칙, 삶의 법칙(머리와 몸의 관계로 둘이 하나되는 불변의 이치를 따른) 따라서 구원의 원리(마지막 아담과의 둘이 하나됨)를 나타내어 주셨건만, 과연 얼마나 얼마만큼의 사람이 화답해 올지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인생들이 모두 자아중심이 되어 서로를 믿지 못하는 상황임에도 세상은 용케 잘도 굴러간다 하지 말 것은 그 이유를 3운법칙이 드러냈다고 했거니와 그래서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돌아가도록 철저히 통제를 해놓으시기 때문이라 했지만, 이런 통제된 세상은 약속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기에 무의미하므로 복음 전파만 끝나면 즉 믿어 약속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다 선별한 후에는 지체없이 끝나는 것이다. 약속대로 지킬 수 있는 사람을 가려내시므로 그 작업만 완료되면 이 세상이 더 지체해 있을 이유가 없음이다.

사람 생기자마자 살인극부터 먼저 일어난 이 야수와 같은 세상이 오늘까지 지탱해온 그 원인이 하나님의 이런 제어 장치 때문인데 그 실상이 3운법칙으로 드러났다고 했거니와, 한 난파선이 닿은 곳이 어느 외딴 섬이었는데 거기 상륙한 십 수명의 선원들이 나중에는 하나만 살아 남아 여자와 아이들만 수두룩하게 되었다는 실화가 있다. 서로 응얼거리고 다투고 미워하고 죽이고 하다가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일정한 법칙 아래에서의 통제 없이는 인간 세상이 처음부터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며 하나님이 무슨 필요가 있느나며 큰 소리 땅땅 치는 인생들이니 참으로 한심하게도 미련하고 철부지하지 않은가. 단순하고 별로 "아는 것이 없는 무식한 사람들"은 오히려 가장 논리적이라 할 수 있는 어린 아이의 논법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건만 소위 지식 있고 배웠다고 자랑하는 이들이 그런 미련함 축에 끼어 드는 것이다. 자아중심의 세계가 여태까지 지속되어 온 "신비로움"의 까닭이 드러났으니 이를 절대 무시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니, 과학자들은 부질없는 데에 신경쓰지 말고 이것부터 깨달아야 하는 것.

이를 깨닫지 못하면 천지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 된다. 이 세상 돌아가는 그 얼개가 밝혀진 것이니 곧 절대자의 통제로서, 도토리 키 재기로 똑같은 인생들이 모여 사는데 이를 어느 인간이 통제한단 말인가. 국가가 하는가? 국가도 사람이 하는 일. 전쟁 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래서 절대자가 세상을 통치하는 것이 필연임을 느부갓네살 왕을 통해 세상에 가르치신 것. 그 선원 이야기도 수가 작아 한 명이라도 살아남았지 수가 많으면 한꺼번에 전멸했을 개연성이 높다.

그것도 그 남은 식구 먹여 살리라고 3운버칙이 작용했기 때문. 이와 같이 자아중심의 세상 벌써 망했을 것이나 가까스로 지탱해가는 비밀의 실체가 바로 3운법칙으로 드러난 것이다. 사탄 곧 용이 이 세상 신(고후 4:4)이요 임금(요 14:30)이 되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부리시는 영"(히 1:14/욥 1:7)으로서의 위치인 것이다. 구원 받은 사람들을 천사들이 전담하여 봉사하는 것과 같은 차원이다(마 18:10). 그래서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엡 2:2)이라 한 것이다.

그렇다고 구원 받은 이들에게 전혀 손대지 못하는 것은 아니니(요일 5:18) 주님께 손을 대어 죄수 취급하여 포박해 가서 법정에 세우고 사형에 처한 것도 그렇게 할 수 있는 때가 되었기 때문으로 주님께는 이 역시 일종의 시험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세상 신은 시험하는 자로서 우리로 온갖 고난에 직면하도록 하는 것이나, 욥기에서 보듯이 반드시 하나님의 허락 아래 되어지는 것으로서, 그렇지 않고는 문자 그대로 한 손가락도 우리를 건드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험에 넘어가 아담 부부가 그 말을 들었듯이 우리도 아담처럼 되는 경우 사정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즉 현재의 인간 세상 곧 만인을 조종하고 관장하는 얼개가 3운법칙이다. 그 복잡 다단한 관계에서 천사들과 악령들이 어떻게 해서 그들의 역할을 수행하는지 그런 것은 우리가 알 바 아니요, 단지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렇다는 사실만 아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3운법칙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려는가. 어떤 것을 부정하거나 반박하는 데에는 그만한 충분한 확증이 있지 않은 다음에는 불가능하다. 그러면 50:50으로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려는가.

그것은 또 더 없이 미련한 짓이 된다. 원래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자세가 아무 일도 못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 3운법칙의 경우 초자연계의 실존을 증명하는 3윈1체 원리를 검증하며 이상 설명과 같이 초 정밀한 인간 생애의 관장(管掌)을 의미하므로 너무나 거창한 것이다. 이런 사실 앞에서 가도 부도 아닌 어중간한 자세로 있기에는 사안이 워낙 심각한 것이다. 부정할 수 있는 무슨 단서가 없는 한 이를 적극 활용하고 적응하는 것이 지혜이다.

3위1체의 원리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고 그 중간은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어정쩡하게 양 다리 걸치기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 시대는 더 이상 그런 것을 수용하지 못하는 때이다. 양단간의 결정을 내려 스스로 대응하지 않고는 거센 물결에 어느 틈에든 휩쓸려 내려가는 것을 깨닫게 될 터인데 그렇게 인식할 때에는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다. 거센 물살에 몸을 그대로 맡기느냐 아니면 재빨리 판단을 내려 거기서 즉시 빠져 나오느냐 역시 여기서도 양자 택일만이 있을 뿐이다.

지구는 정밀한 기계와 같다는 바다 사나이 마도로스 캡틴이 쓴 수상록에 이런 대목이 있다.

언제나 보이는 것은 수평선, 더러는 지겹기까지 한 수평선, 나는 또 거기다 육분의로 태양을 끄집어 내렸다. 정오의 위치를 내기 위해 정중시(正中時)의 고도를 잰 것이다. 태양이 측자의 자오선상에 정중해 있을 때 즉 천의 극 정점 천체가 자오선 상에 일직선이 되었을 때 육분의로 고도를 측정하여 위도를 구하는 자오선 고도 위법이란 항해술이다. 지구는 정밀한 기계와도 같다. 아니 모든 우주의 원리는 일정한 법칙 속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만든 모든 기계가 제작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듯이 대우주의 모든 천체는 그 법칙에 의해서 오늘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대우주의 창조자는 누구일까. 제각기 정밀한 기계와도 같이 일정한 법칙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데, 나는 천측(天測)을 할 때마다 강렬하게 느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확고부동하게 대우주를 만든 창조주 - 즉 신(神)은 있을 것이라는 확신같은 믿음이다. 나는 항해를 배우기 전에는 무신론자였다기보다는 막연하게 우주의 자연 발생설을 믿고 있었다.

"지구는 언제부터인가 존재해 있었다, 그리고 또 인간은 언제부터인가 지구에 자연히 생겨나고 종족을 번식시켜 가고 있었다"-나는 막연하나마 이렇게 알고 있었고 또 신(神)에 대해선 별 관심도 갖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배를 타게 되면서 항해술을 알게 되고 험한 바다에서 생활하다보니 어느새 천체과학을 이해하게 되고 서양의 점성술에까지 흥미를 갖게 되었다. 나의 관심은 차츰 대우주를 창조하고 지배하는 신(神)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만약 인간이 알아낸 지구의 운행 법칙이 잘못되었다면 내가 지금 천측해서 낸 현위치가 틀려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매번 목적항에 도달하고 보면 이는 한 치의 오차없는 초과학이 아닌가 한다. 모든 인간들이 만들어낸 물건들이 만든 사람의 의도가 있듯이 일정한 운행법칙을 갖고 있는 우주 속의 천체를 만든 창조주가 없을 수가 있을까.

"모든 별들은 움직이되 다만 북극성만은 움직이지 않는다" 하고 세기의 영웅 줄리어스 시이저가 좋아했던 별 - 꼭 물 국자처럼 생긴 북두칠성의 끄트머리의 MERAK와 DUBHE라는 별의 일직선 상의 밑에 위치한 북극성 - 북쪽 하늘에 떠있는 북극성의 고도는 항상 그 지방의 위도와 거의 같다. 그래서 뱃길을 잡을 때 북극성 위도법을 쓰면 북극성의 고도를 측정해야 하는데 그곳의 위도와 같게 육분의로 재면 쉽게 관측할 수가 있다. 그것은 신(神)의 오묘한 섭리다.

언제나 변함없이 북쪽 하늘 어느 곳에나 그곳의 위도만큼의 고도로 항상 정좌하여 있는 별. 아무리 생각해도 우주의 신비는 불가사의할 뿐이다. 인간은 어디서 왔으며 또 왜 살며 그리고 어디로 가는가. 나는 이 세가지의 명제를 아직껏 풀지 못하고 있다. 아니 영원히 풀지 못할 것인지도 모른다. 종교적 측면에서 보면 그리스도교, 파라문교 등이 유일하게 그것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있을 뿐 다른 종교에서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종교에서조차 결론을 못내리고 있는 그 명제. 그러나 분명히 그 명제의 해답은 있을 것이다. 인간이 그 해답을 풀 수 있을 때가 언제일는지 - 시간은 자꾸만 흐르고 있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마치 죽음의 소리와도 같다. 1초가 흐르면 그만큼 우리의 생명도 줄어들 것이고 언젠가 마지막 1초가 다가오는 순간 우리의 생명은 없어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우리는 그 귀착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선박이 항해를 해서 목적항에 도착되듯이 우리 인생도 항해가 끝나면 목적항인 도착지에 과연 닿을 수 있는 것일까. 아직껏 이 명제를 푼 사람은 없다. 그러나 어딘가 도착지는 있을 것이다. 오직 신(神)만이 알고 있는 곳 - 그곳을 향해서 우리는 지금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소리 없이 다가서고 있다. 그리고 차츰 죽음에 순응되고 인생을 깨닫게 되는 것일까. 그 순응 - 그것은 마치 신(神)과의 접근인지도  모른다.

세계의 많은 문학가, 과학자가 끝내는 종교에 귀의되어 숨을 거두고 만다는 사실 그 엄연한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옳을까. 종교를 갖는다는 것, 그것만큼 사람으로서 중요한 일도 없을 것이다. 구약성경의 솔로몬 전도서를 읽어보면 인생의 종말을 알 것만 같다. 솔로몬 대왕이 말했듯이 죽음 직전에 선 인간이 부귀, 영화, 권세, 미녀가 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고 또 헛되다고 했다.

그렇다. 인간사의 모든 행복이란 것도 한낱 헛된 것이다. 다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신(神)을 찾아 알고 믿음으로써 사랑으로써 겸손해지는 것. 사람은 사람일 뿐이라는 것. 그것이 곧 죽음을 알고 그리고 조용히 우리의 최종 귀착지로 향해 가는 준비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닐까. (姜錫坤 지은 1992년 간행 '바다와 思索'에서 일부 발췌).

이 정밀한 기계와 같은 엄밀한 법칙 적용이 인간 생애에 나타나 있는 것이 '트리니 호모(3運법칙)'인 것이다. 지, 정, 의도 없는 그냥 물체인 천체의 움직임 즉 자연법칙에 의한 한 치 오차 없이 운행되는 것을 보고 만물을 지은 창조자를 생각하게 된다면 모든 인간을 이와 같이 정밀한 기계 이상으로 재어 다스리고 있는 인간 법칙, 인간 생애의 법칙을 보고서는 무엇이라 하려는가. 인간은 어디서 왔으며 또 왜 살며 그리고 어디로 가는가 하는 인간 항해술을 가르치는 것이 성경이 아니던가.















2016년 2월 27일 토요일

가장 중요한 것 세 가지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고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셨다"(요 21:20-22). "네게 상관이 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말고 네가 해야 할 일에만 착념하라"는 말씀이시다. 우리가 마음에 두어야 할 일 외에 그 무엇을 알고자 하든지 궁금해 하든지 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상관이 없는" 일이 된다.

하나님 주신 힘이요 시간인데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만 사용하도록 하나님 앞에 약속한 마당인데 그래서 하나님이 것이 되어 있는 것을 왜 마치 내 것처럼 내 시간처럼 그런 소용 없는 일에 신경을 쓸 것인가. 이것은 나의 소유가 아닌 것에 대한 범법이 된다. 그러면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주님을 내가 상전(주인, 나의 소유주)으로 모신 이상 주님을 따름이다. 주님을 섬김이다. 그 외에 우리가 관여할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내가 주님을 섬길 때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주님 친히 그리고 먼저 나를 위하시고 자신을 바쳐 내게 영원하신 선물로 주셨다는 사실. 즉 사랑으로 둘이 하나됨에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이다. 그리고 갑은 을과 주종, 대소, 선후. 인과 관계에 있으므로 먼저 본을 보이시고 내가 따르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본을 보이신 것이 십자가 고난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다. 바로 이 사실을 토대로 하고 근거를 삼아 주님만을 섬기고 나를 위하지 않는 자기 부인이 이루어지는 것.

실상 더 따질 것도 없이 이것 하나만 해도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전부가 아닌가. 이 외에 우리가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주님의 부활하심은 여러 증거가 있지만(행 17:31), 여기서 눈을 돌리는 것은 바로 위의 구절이 나타내는 사실 즉 부활하신 주님과의 대화이다. 실제 사실이 아니라면 아무리 천하 없는 거짓말쟁이라도 이런 식으로는 절대로 거짓말을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진실성[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성령의 서명 날인). 거짓말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이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인즉,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부활이 이같이 입증되어 있는 마당에 이 사실을 기반으로 하여 모든 생각을 하고 행동해야 하게 되어 있고 또한 마땅한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으시며 아버지의 나라 임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의 주기도문 서두에서도 보듯이 '하나님'과 '그 나라' 그리고 '그 뜻' 이 세 가지만 알면 족하다. 하나님은 3위1체로 계시고 그 3위1체 원리에 의해 자연계가 있으면 초자연계에 속한 평화의 나라, 생명의 나라, 지상(至上) 행복의 나라가 존재함을 알 수 있어 오직 그 나라를 목표하며, 또한 이 3위1체 원리에 의한 머리와 몸 관계로서의 영원한 생명 세계의 구조를 알아 그대로 따르는 것 이상으로 우리가 괘념할 일은 없는 것이다.

그 외의 일은 지엽적인 것이고 나중에 천국에 가서 알아도 얼마든지 충분히 완벽하게 알 수 있는 일이니 당장 발 등에 불부터 꺼야 하는데 그런 것에 생각을 돌릴 여유도 없거니와 그런 데에 마음을 씀으로써 우리의 집중력을 약화시킬 필요는 없는 것이다. 가령 고난 받음으로써 영광을 얻게 되는데 십자가 강도처럼 임종시에 믿게 되는 이들은 그러면 영광을 얻지 못한다는 말인가 차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라든지, 베드로가 언급한 대로 죽어서도 믿을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어 있다면 굳이 이 세상에서 믿으라고 강권하듯이 할 필요가 없지 않으냐 하는 것 등으로 인해 갑론을박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기록된 말씀을 따라 적당히 상식 수준으로 이해하면 되는 것이고 그에 대한 해석 차이로 분위기를 요란스럽게 만들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명백한 이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 이 세상 생명이 끝이 아니고 반드시 영원한 죽음의 상태가 있어 생명과 반대되는 상황이 영원토록 전개되든가 아니면 이 지상에서의 삶보다 한정도 없이 행복한 생명의 세계에서 삶의 낙을 누리게 되든가 할 것이니, 이 아주 심각한 현실에 눈 떠 생명의 한 몸 체제 안으로 들어오도록 사람들을 힘써 권유하고 보살피는 일밖에 시급한 일이 없는 것이다.


"상관이 없는" 일 중에는 이런 것도 있으니 즉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것이나"(롬 14장) 재세례니 침례니 세례니 하는 것 모두 지엽적인 것이다.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것은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 살거나 죽지 않고 오직 주님을 위해 살든 죽든지 한다"(14:7,8)는 데에 있다. 이것만 확실하고 그 열매가 분명하면 즉 "말에 있지 않고 능력(행함)에 있으면"(고전 4:20) 모두가 내 형제요 한 아버지를 모신 식구요 한 몸의 지체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앞으로도 계속 이런 지엽적인 것을 가지고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지 못하는"(엡 4:3) 일이 빈번할 줄 알고 그 경우 어떻게 해야 마땅한지 가이드 라인을 제시해준 것이다.


이런 일을 가지고 형제들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것은 베드로도 경고한 바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자멸하는"(벧후 3:16) 사례만 남길 뿐이다. 안식일을 가지고 유대인들이 주님을 비판할 때에도 주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막 2:27) 말씀하심으로써 사람 삶이 "하나님과 동행함(walking with God)"에 있는 것 다시 말해 하나님과 머리와 몸 관계를 유지하여 "그 뜻대로 행함"(마 7:21) 즉 순종함에 있는 것이지 이런 것들을 가르치기 위해 임시로 정하신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갈 4:10) 것에 매여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뜻을 행하는 것"을 그런 지엽적인 것을 지키고 고수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이가 많은데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가 되었다"(갈 4:9)고 한 대로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우니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가 되었다"(고전 8:1-3)"는 사실로써 충분한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함"을 어떤 제도나 형식을 무조건 따르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나,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살든지 죽든지 하는 자기 부인에 있는 것이다. 그런 것도 전혀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 아무리 충실히 지켜도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자아 중심은 본래 그런 형식을 좋아하고 그 틀에 따라 행하면 되는 줄로 아는 경향이 있다. 그 형식에만 맞추면 "육신" 타령이나 하며 자기 변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한 몸 체제로서의 영생하는 삶, 행복하게 사는 유일한 방책으로서의 이 둘(머리와 몸)이 하나되는 이치에 있으므로 자기를 위하지 않으면 그것이 선이요 의이며 거룩함인 것이다. 형식을 지키고 그런 지엽적인 것에 매달리는 것이 정작 자기를 위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라면 그 누가 그런 것을 막으리요. 그러면 그렇게 형식에 유념하는 이는 그렇지 않은 이들을 판단하고 비판하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이 바울이 말하는 요지다. 그래서 "자기 마음에 확정하라"(롬 14:5) 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확신하면 천하 없어도 이를 지킬 것이다. 그 지키는 바가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산다는 데에 있을진대 그것을 지키지 않는 이들이 역시 하나님을 위해 살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취지에서 그렇게 한다면 그들을 비판할 일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긴가민가 "의심하고"(롬 14:23) 행하는 이는 죄가 성립됨을 경고한 것이다(:23/고전 8:12). 고로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까닭에 "형제로 거리끼게 하지 않는" (:21)것이 중요한 것이다. 즉 "형제로 근심하게 만들면 사랑으로 행치 않음이 되어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를 망하게 하는"(롬 14:15/고전 8:11) 죄가 되기 때문이다. 술이 약주라 하여 마시는 이도 그러나 술에 약한 형제가 이로 인하여 담대함을 얻어 술로써 자신을 망치는 예가 허다하므로 아예 술을 입에 대지 않는 것과 같으니(고전 8:9) 바울이 "평생 고기를 입에 대지 않겠다'(고전 8:13)는 말과 같은 맥락인 것이다. 

2016년 2월 26일 금요일

바울의 로마서 강론의 초점은 "그리스도로써 얻은 구원"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은혜"에 맞추어져 있어



"이 사람을 아시나요?"

아가서에 "이에 내가 일어나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 성중의 순행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아 3:2,3) 하는 시구(詩句)가 그러하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왜 남녀 사랑의 연가(戀歌)가 끼어 있다고 생각하는가?

남녀 사랑이 무슨 신비한 것도 아니다. 중국 일원의 동양인들이 음양 화합(조화)이라고 말은 풍성히 해왔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이 존재해왔다고만 알았지 그 이치를 알지 못했다. 이치란 다른 것이 아니라 음과 양의 둘 중 하나가 애초 홀로 있던 데에서 발단되어 다른 하나를 파생시킴으로 된 그 유래를 말하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내듯 사람이 사람을 내지 짐승을 낼 수 없고 짐승은 짐승을 내지 사람을 못내듯이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사람이라는 결과를 낸 원인은 사람일 수밖에 없으나 사람보다 더 완벽한 존재이신 것이다.

음과 양은 그러므로 사람보다 더 확실한 존재가 사람을 만드셨을 그 분명한 사실을 기점(起點)으로 하여 큰 것 즉 양이 음 즉 작은 것을 낸(派生시킨) 것이다. 이러한 명약관화한 사실을 가지고 창조주를 시인하면 마치 세상이 망하기라도 하는 듯이 이 세상이 피조물인 것을 밝히기를 꺼린 것이니 악마 용이 처음부터 인간 세계를 완전 장악해 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양인 남자가 음인 여자를 내었기 때문에  즉 남자에게서 여자가 나왔기 때문에 둘이 독립된 존재가 되었어도 그 원래 하나로 존재하던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는 회귀성, 귀소성(歸巢性)이 작용함으로써 남녀 사랑이 생긴 것이 무어 그리 어렵고 복잡하다는 말인가.

고로 남녀 구별이 없어지면 이런 성향도 언제 있었냐는 듯이 깨끗이 소멸된다. 어떤 이는 천국에서 결혼하여 생산하는 일은 없어도 남녀 교접은 그대로 지속된다고 함부로 할 말 안할 말을 쏟아놓는데 성애(性愛)를 무슨 대단한 것인 양 인식하는 무식의 발로일 뿐이다. 첫 사람 아담에게서 여자가 나왔으니 마지막 아담에게서는 그 성령으로 그 몸된 교회가 파생된 것이다. 육체로 하나된 것이 여자와 남자의 한 몸됨이요 우리는 주님과 합하여 한 영으로서의 하나다. 육체로서 하나됨이 영으로 하나됨보다 더 완벽할 리가 없다. 고로 이 자연계 몸이 느끼던 희열은 명함도 못내밀 정도로 초자연계에서의 삶의 낙은 완벽하다는 것쯤은 상식적으로 알아 둘 일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세상에 육체로 계실 때 항상 자신을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 곧 사람)"로 지칭하심으로써 사람이심을 역설하심과 같이 내가 상대하고 있는 대상은 "한 사람"이신 것이다. 때문에 마지막 아담으로서 나와 하나도 다르신 점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 점에서 하나님이심이 드러나느냐 하면 나와 함께 사랑으로 사시는데 나 아닌 다른 이들과도 똑같이 함께 마치 그 사람과만 함께 사시는 것처럼 사신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육체로 계시는 대신 내 속에 계신다는 이 두 가지로 한정해서 생각해도 충분한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영으로 계시니까 나와 함께 하시지만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만질 수 없다는 점(요 1:1).

고로 항상 '한 사람'이신 사랑의 주님과 함께 기거동작하는 것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고 마음에 되새길 필요가 있으며 이로써 우리는 "이기는 자'(계 2:11,26/3:5,12/21:7)의 능력을 충분히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나와 함께 사시는 마지막 아담 친히 그 권능이신 것이다. 사탄을 비롯한 모든 악령은 물론 모든 영물 위에도 군림해 계시는 분과 함께 하나됨이니 아담은 당초부터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위치였던 것이다.

갑과 을이 하나이면서도 갑이 을이 아니고 을이 갑이 아니다. 그러나 갑이 을이고 을이 갑이 되어 있으니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보어의 상보성 원리 즉 피차간 보완함으로 완벽함을 이룬다는 둘의 불가분성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절대 필수적인 존재이므로 하나로 존재하고 하나로서 항상 움직이는 것은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그러나 엄연히 둘이므로 양면성과 동시성이니 즉 내가 주님을 위하지 않으면 주님께서도 나를 위하실 수가 없으니 이를 우리는 엄중하게 마음에 아로새겨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으로서도 하시고 싶어도 불가능하신 일이기에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우신 것이다.


사람이 처음부터 영생할 수 없으니까 영생하는 것이 해답이요 우리 구원이라면 아담의 범죄가 오히려 잘된 일이라는 궤변이 나올 만하지 않은가. 왜냐면 아담 덕분에 인간이 죄 가운데 놓이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를 영생하게 만드셨으니까 당연히 그런 논리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자연계에 속해 있던 인간이 초자연계 존재로 변천해 가는 불가피한 과정에서 생긴 일이므로 인간에게 이 불행의 책임을 전적으로 물을 수 없다는 궤변이 아니 나올 수 없음이다. 3위1체 원리에서 자연계가 있으면 반드시 초자연계가 있고 초자연계가 있으니 반드시 자연계가 있다는 증명이 되는데(항상 양면으로 만물이 존재하니까) 인간이 자연계에 처음부터 있었다고 하면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 순리가 된다.

그러나 성경대로 애초 인간이 영생하고 있었음에도 범죄로써 시방 죽은 자가 되어 있는 상황일진대 이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는 당연한 것이요 이를 알고 회개하여 다시는 범죄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가 명확해야 함이 우리의 구원에서 필수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친히 나 위해 죽어주시지 않으면 안될 만큼 죄의 대가라는 것이 엄청난 것임을 처음부터 알아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 사실을 내가 나의 죄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라고 못박고 있다. "다시"(히 6:6)라고 했으니까.

이 세상을 사는 곳으로 착각하고 이럭저럭 살다가 덤으로 영생이나 얻어볼까 하는 사람은그 누구도 구원될 수가 없다는 것이 이 때문이다. 인류가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린 것은 단지 구원 받기 위함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려 함이라 하신 대로 구원을 먼저 받음으로써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데에 핵심이 있는 것. 

목적이 영생이 아니라 죄를 짓지 않는 데에 있기 때문에 자기 백성("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준비하신 것"이라 한 대로-고전 2:9)들을 죄에서 구원하시려 오신 것이라 한 것이다(마 1:21). 그러므로 구원 얻었다 하여 고대광실 좋은 집에 좋은 옷에 산해진미로 배를 채우며 범죄하기 전의 아담처럼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아담의 시대인즉 우리의 머리께서 나타내신 하나님 아들들로서의 본무를 다하여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 아버지의 일을 함에 유일한 목적이 있다 하는 것이다.

편안하고 잘 살기 때문에 의를 행함이 아니라 갖은 방해와 장애를 무릅써서라도 선이 좋고 의가 좋아서 행하도록 즉 사람 구원하는 일이 너무나 보람 있고 의미 충만한 일이기에 기쁨으로 행하도록 함이요 따라서 그렇게 하는지를 동시에 시험하기 좋도록 짜여져 있는 것이 현재의 이 세상 구조인 것이다. 오늘날 갖가지 오락물 비슷한 것으로 시간 보내기 너무 좋은 것들로 꽉 차 있는 것도 이런 시험의 일환임을 알아야. 그러므로 사람 구원하는 일에 여념이 없는 구원 받은 이들은 이런 것에 물들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에 조심을 기울여야 함은 마땅하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 즉 구원하신 것은 우리가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심이라"(살전 5:10) 했으므로 이 세상에서 그렇게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천국에 가서야 그렇게 사는 것을 말하지 않음이니, 주님께서 일하시니 나도 당연히 일하는 것이요 남으신 고난을 마저 채우심으로 그 일을 수행하시니 나는 그 고난 받음의 육체를 제공해드리어 함께 고난 받음이기에 "내 몸에 그 남은 고난을 채운다"(골 1:24) 함이요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다"(빌 1:29) 함이다. 찬송가 가사를 대개 보면 이와 같이 이 세상에서 영광스럽게 함께 사는 것을 말하지 않고 내가 얻은 것만 강조하여 그것을 감사한다 하고 즐거워한다는 내용으로 그치니 구원 얻는 믿음이 실종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해 살게 하려 하심"(고후 5:15)이라 했지, 자기를 믿는 자들로 하여금 영생의 향락을 누리게 함이라 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어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다"(살전 5:10)라고 했지, 우리로 하여금 천국 가게 하셨다 하지 않았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해 죽으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소유로서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롬 14:8,9)이라 했지 즉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함임을 강조했지, 단순히 우리가 구원 얻어 영생함이 목적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마치 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죽으신 사실을 인정하기만 하면 그것이 곧 영생에 대한 보증이나 되고 곧바로 천국에 들어가는 비자쯤이라도 되는 듯이 가르쳐온 것이다. 말 자체야 하자는 없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살아 주님은 나 위해서 사시니까 나는 당연히 주님 위해 살든지 죽든지 한다는 사실을 무엄하게도 생략해버리니 그 때문에 "나의 멸망을 대신하여 죽으셨다"고까지 논리가 비약하게 되고 그래서 위로보다 더 많이 지적한 성경의 그 숱한 경고 경계의 말씀을 온통 무더기로 완전 무시하니 어찌 자멸로 통하는 통로만 가르침이 아니냐는 것이다.

경고를 할 자리에 가서 경고하는 것이 전혀 없었으니, 전부가 다 비참한 운명을 당하지는 않았겠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렇게 오도하는 당사자 자신을 비롯해  그런 파국을 당했겠는가! 신약성경은 신학 총론이나 개론이 아니다. 사도들의 편지들만 모아 나열한 것에 불과하다. 바울만이 로마서에서 체계를 갖추어 요약하여 그나마 말했을 뿐이다. 그러나 바울은 서두에서부터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롬 2:6) 했으니 즉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7) 자기 중심(selfishness-우리말 번역 "당을 짓는다", 흠정영역 "contentious"는 오역)이 되어 진리를 따르지 않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신다고 명시한 것이다(:8).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못을 박고 믿음의 주제로 옮겨 간 것이다(:13). 

의인은 하나도 없기(:10)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이 아닌가. 하나라도 있을 수 있다면 절대로 그런 십자가 고난을 받으실 수 없다. 그 한 사람으로 만족하실 수밖에 없음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얻는 의라 하여 혹 오해할까(오늘날처럼) 싶어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냐 그럴 수 없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운다"(롬 3:31)는 말을 곁들이기를 잊지 않았다. 행위로써 구원 얻지 못함은 하나님의 계명이든 모세의 율법이든(둘은 다른 것이 아니고 그림자와 실체일 뿐이지만) 행함으로 구원될 수 없는 것은 구원되지 못한 상태에서 무엇이든 행하니까 구원 얻겠다는 자아중심의 발로일 뿐 선과 의가 좋아서 행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죽은 자가 아닌 산 자가 선과 의가 좋아서(생명의 길 곧 사는 방법이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 생명(생명의 현재 상태의 확증)이고 또한 생명에 이르는(미래 보장) 것이다. 율법은 산 자가 지키는 것이니 죽은 자는 무엇을 하고 말고도 없다. 죽은 자가 무엇을 한다는 말인가. 먼저 산 자부터 되고 보는 일이 화급하므로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구원부터 받아놓고 보도록 하시는 것이다. 

즉 산 자부터 되고 나서 살리시는 일부터 먼저 하신 다음에 순종 여부를 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어려운 일도 복잡한 것도 없고 상식 수준의 평범한 이치다. 이 살리시는 일부터 하신 것이 우리 구원 받음인 것이다. 곧바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착각할 일이 아니건마는 그렇게만 일방적으로 가르쳐 왔기에 성경에 대한 무지무식이 도를 넘었다는 것이다. 정작 중요한 요점은 빼먹고 겉 핥기만 해온 것이다.

바울이 앞에서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굳게 세운다고 말한 것처럼 역시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을 이해함에 혹여 차질이라도 있지 않을까 하여 십자가 상에서 회개한 강도를 통하여, 우리의 구원이 새 창조, 다시 출생하는 것임을 명시한 것이다. 즉 선을 행함을 의당히 강조해야 하는 까닭에 혹 하나님의 구원이 미완성의 것이라도 되는가 착각할 소지가 있을 경우 이를 완전히 분쇄하기 위함이다. 그 강도는 그 길로 천국행이었음은 주님의 말씀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하심으로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회개한 연후 선행할 기회도 시간도 없었다. 그러므로 모든 행함도 우리가 먼더 산 자가 된 바탕을 기반으로 하는 것임을 밝히신 것이다. 즉 새로 창조되었으면 처음부터 영생하는 자로 만드신 것이지 선악 여부를 따져 생명(영생) 여부가 결정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담이 그러했고 천사들이 그러했다. 스랍과 그룹들이 그러했다. 잘 나가다가 중간에 변한 것이다. 이 중간에 변하는 것을 미리 걸러내는 작업상 필요해서라도 사람 살리는 일을 우리에게 부탁하신 것이니, 사람 살리는 일을 하되 고난을 통해서 이루는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의 의미이다. 고난을 받기 싫어서라도 자아중심이 작동되어 불순종으로 분류될 수 있는 소지와 여지를 충분히 남겨 둠이다.

"예수님은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주심(우리 위해 죽으심)이 되시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우리의 구원됨)을 위하여 살아나셨음"(롬 4:25)을 바울은 명백히 하고 있으니, 우리 위한 죽으심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죽으심은 다시 살아나심을 위함이니 그 살아나심이 우리의 구원이 되기 때문이다. 무지한 사람들은 이를 거꾸로 알아들어 그 죽으심이 우리의 구원이 된다고 하여 "대신 죽으심, 운운" 하는 것이다.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한번 우리 위해 대신 죽으신 이상에는 이 사실이 번복될 수 없다, 그러므로 육신 가운데 살아도 이 사실은 항구 불변이니 우리의 천국 행은 변동될 수 없는 것인즉 좀 죄를 짓고 자아중심으로 살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생에 들어가게 하시는 이것이 은혜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그럴싸해서 제멋대로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해서 인위적으로 교리를 덜렁 뚝딱 만들어놓고는 이것이 성경이다 하고 가르쳐 온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이에 동조하다보니 그런 것도 아무 이의가 있을 수 없는 전통적 가르침으로 굳어져 권위마저 부여되니 지금까지 도미노 식으로 일사불란하게 내려 온 것이다. 자아중심에서 오는 성경 왜곡이다. 자아중심에서는 그 신학자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이나, "많은 사람"이나, (그 수가 수십 억이 될지언정) 차이가 없어 서로 동조하고 동감하기 때문에 그런 교리가 성행해 온 것이다. 다수가 진리가 아니고 정의가 아닌 것이다. 이 배경에는 이 세상 신으로서의 사탄의 책동과 선동이 깔려 있음이니 인간 욕심과 악령들의 부추김 또는 욕심이 만들어낸 합작인 것이다.

바울은 그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 구원을 역설하면서도 계속하여 앞서 지적한 대로의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은 것이니, 혹 이렇게 은혜를 강조하면 죄를 지어도 이제는 무방하다고 오해나 하지 않을까 하여 다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2) 한 것이다. 그리고 재차 이를 강조해 마지않기를 "우리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않으려 함"(롬 6:6)이라고 했다.

앞서 지적한 그리스도의 다시 살아나심이 우리의 구원이 됨을 좀더 부연 설명을 한다면, 그 죽으심은 다시 살아나심 즉 나와 하나되심을 목적한 것이니, 하나되심이 구원인데(애초 만물을 창조하실 때 이 하나됨을 토대로 만물이 존속되게 하신 것과 일치하게) 이 하나됨은 먼저 우리 위해 죽으시지 않고는 즉 나의 죽음에 그리스도 친히 동참하시어 하나가 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이 아닌 부활이 우리의 구원의 요체가 됨은, 이미 죽음의 선고를 받은 자는 마땅히 죽어야 하고 그와 같이 죄의 대가로서의 죽음이 완료된(대가 지불) 바탕 위에서만 새 창조의 새 생명이 가능해져 비로소 시동을 걸 수 있게 되는 까닭이다.

그리고 그렇게 산 자가 되어 범죄 전 아담의 상태로 복귀되고서도 다시 범죄하면 그 구원이 원천 무효가 됨이니 왜냐면 죽음이라는 결과의 원인이 범죄인데 아무리 결과를 벗어났어도 그 원인을 다시 만들면 동일한 결과로 낙착, 환원되므로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진전이 없는 까닭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 아니, 그리스도께서 나의 죽음에 함께 해주심은 나와 하나되시기 위함이니 이 하나됨은 당연히 죽음에도 생명에도 함께 함이라 나의 죽음에 함께 하시어 죄인으로서의 십자가 처형의 형식을 자진해 취하셨고 그렇게 죽으신 다음에는 그 하나됨을 인하여 그의 생명에 내가 동참 즉 함께 하여 비로소 내가 산 자가 됨이므로 그 죽음이 아닌 부활이 내게 구원의 직접 기반이 되는 것이다.

만약 죽음뿐만이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니, 그렇게 죽으셨다고 해서 내가 살아날 아무 근거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악마는 이런 되지도 못한 근거를 억지로 만들어 땜질하여 붙여 놓고는, 이치로나 상식으로나 전혀 당치도 않는 것을 "하나님의 일이니까 신비하니까 우리의 이성에 맞지 않지만 사실로서 무조건 믿으면 된다" 식의 해괴한 말장난을 하면서 인생들을 이제까지 우롱해온 것이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지만 그럼에도 전파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니 이 하나님의 사랑을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어"(마 18:3) 믿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교회 "제도"나 "기구[機構]"에 순종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우 아무 하자 없이 구원이 가능했던 것이니 그만큼 구원의 도리가 사랑 하나로서 핵심을 이루어 너무나 간결 명료하기 때문이다.

그 살아나심이 내게 구원이 됨은, 이와 같이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고 그의 살아나심이 나의 부활이 되기에 지금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하나됨이 구원인즉 살아나셨기 때문에 내가 현재 산 자가 되어 있고 산 자와 하나되지 죽은 자와 하나되면(이미 이 과정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완료 종료된 것) 죽은 자로 남을 뿐이지 어찌 산 자가 되는가. 살아 계신 주님과 내가 현재 하나되어 있기 때문에 그 죽으심, 부활, 승천, 하나님 우편에 앉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세 등이 모두 내 것이 되어 있음이다.

그 중 하나라도 부분적으로 내 것으로 차지하는 것이 아니고 전체를 다 차지하는 것이므로 없으면 아무 것도 없고 있으면 전부가 있음이다. 우리가 그 영광에 동참함과 동시 고난, 고통, 죽음에도 동참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영생이라는 별개의 그 무엇을 받아 챙기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사람 그리스도의 선물을 받아 그 삶을 내 삶으로 그리스도 자신을 내 것으로 하여 그와 함께 하나되어 사는 것 자체를 가리킴이니 곧 이 사실을 기반으로 영위되는 삶, 일상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살아나심이 우리를 의롭다 하심이라 한 이유이다(롬 4:25).

바울 사도는 계속하여 이상 사실을 강조한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 그러므로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본능적인 자아중심의 욕구)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게 바치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할 것이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음이다. 그런즉 어찌 되는가.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짓겠는가. 그럴 수 없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 알지 못하는가. 죄의 종이 되어 사망에 이르든가 아니면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든가 할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다.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다.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는가.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이 영생인 것이다"(롬 6:10,22).

영생은 여기서 얻어지는 것이다.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친히 그 영생 자체이시니 그리스도를 차질 없이 내 안에 모심 즉 내가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든 죽든 하는 것이 그 모시는 방법인 것이며(왜냐면 내가 그렇게 할 때 그리스도 역시 나를 위하시어 내게 대한 그 몫을 하시므로, 나는 내 몫을 하고), 영생을 얻었으나 즉 그리스도를 모셨으나 끝까지 모심이 핵심인 것이다. 성경은 이 "끝까지"(마 24:13/고후 1:13/히 3:6,14/6:11/계 2:26)를 강조한다.

이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가리켜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한 생명의 성령의 법"(롬 8:2)이라 하는 것이다. 곧 "성령으로 사는 것이요 그리고 또한 성령으로 행함"(갈 5:25)이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이다"(롬 8:13) 한 그대로다. 고로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롬 13:8) 한 대로 의인 즉 구원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율법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이 본분인 것이다(고전 7:19/요일 2:3,4/계 12:17/요 15:10/14:15).
 

그리스도 친히 아버지와 하나로 계시고 움직이심을 가리켜 대개 "성령"이라 제3인칭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형상으로 하시는 일이지만, 그 형상의 실체로서 아버지 친히 항상 함께 계시고 움직이시는 까닭이다. 이 관계를 일부러 설명이라도 하는 듯이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닌 것이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아버지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실 것이다"(롬 8:9,11).

이러한 명확한 성령에 대한 정의는 주님 친히 하신 말씀에서도 명백하다.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 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될 것이니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줄 것이다"(눅 21:12,15) 하셨고,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실 것이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다"(마 10:19) 하셨고, "무엇이든지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다"(막 13:11) 하신 것이다.

바울은 계속하여 경고하기를 멈추지 않으니, "옳다, 저들은 믿지 않음으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으니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嚴威)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될 것이다'(롬 11:20-22).

이는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명령하신 그대로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할 것이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않으면 그러할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는 것이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않으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지는 것이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른다"(요 15:4-6)에서 "내 안에 거하라"는 명령(계명, 율법, "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을 지켜야 "나도 너희 안에 거할 것이다" 하신  것이다.

이런 명령을 하심은 이제까지 거하시지 않은 것을 말씀하심이 아니라 주님과 나 쌍방간의 연속적인 동작을 의미하심이다. 쌍방의 동시 움직임이지만 번갈아 드는 움직임이니, 갑 다음에는 을, 을 다음에는 갑. 다시 갑이 하면 을이 하고 을이 하면 갑이 하는 그런 순서다. 그리고 내 편에서의 움직임을 순종이라 하고 계명 또는 율법 지킴이라 하는 그 차이뿐이다.

"계명 지킨다" 하면 무슨 폭약이나 건드리는 것처럼 비상처럼 인식하고 있으니 진리에서 너무나 멀어져 있었던 연유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무엇이라고 달리 말하리요. 그런데도 성경과 상치되게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고후 2:17/4:2) 하기를 서슴지 않는 것이다. 자기 합리화에만 바쁘니 이런 자아중심에 진리가 깃들 틈이 없다.

우리의 구원이 기정 사실화한 것을 가리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요 5:24) 하신 말씀을 잘 인용하지만, 정작 이 말씀을 전달한 요한은 이를 정확히 해석하여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않는 자는 사망에 거한다"(요일 3:14)고 못박은 것이다. 그런즉 "새 계명"(요 13:34)을 주신 "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에 순종하는 바탕 위에서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시어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골 1:13)가 적용되는 것이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니(롬 15:30). 여기에 그리스도 외에도 성령을 더 언급했다고 해서 "성령"을 대표하는 "형상"("실체"이신 아버지께 대한)으로서의 아들의 격(格)에 이의를 제기하려는가. 그러면 왜 여기 바울의 지적에 아버지께 대한 언급이 없는가. "성령의 '사랑'"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랑, '아들'의 사랑을 따로 따로 다 말해야 할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언급되어 있으므로, 이 경우 아버지도 포함되는 의미의 사랑은 "성령"의 사랑으로 간단히 끝내는 것이 무난한 것이다. 바울 사도가 의식적으로 이런 표현을 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먼저 말해놓고 보니 하나님의 사랑을 더 지적하고 싶어서 나온 언급인 것이다.

2016년 2월 25일 목요일

"이제 웃는 자는 애통하며 울게 된다" 하셨으니 웃음을 완전히 금기시할 것인가



주님께서 "이제 웃는 자는 애통하며 울게 될 것"(눅 6:25)이라 하신 것은 "위로"(:24)나 "부유함"(:24)과 같은 맥락으로서, 이 세상을 인간(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한 저주 받은 상태로 보지 않고 정상적인 창조 당시의 삶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을 지적하여 경고하심이다. 

무조건 부유한 자는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니, 바울 사도가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셔서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다"(딤전 6:17) 한 그대로다. 사람이 웃는다고 해서 "저 사람은  경건하지 못하고 세속적인 사람이라" 하고 저울질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식으로 잣대를 들이다는 일이 허다하니, 형식이야 물론 중요하지만 그와 같이 겉모양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많은데, 실속은 외면하고 그 대신 형식에 치우치는 것은 자아중심의 한 형태가 되는 것인즉 주의를 요한다. 교회에만 무조건 충성되게 나가면 믿음이 좋은 것으로 분류하는 것도 이런 유형에 속한다. 

이런 것을 성경은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약 2:1) 즉 외형적으로만 판단하는 것이라고 경고한다. 바울이 말한 대로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 것이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하고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라야 한다 함과 같다(롬 2:28,29).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습니까 할 것이나 그 때에 내가 저들에게 밝히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할 것이다"(마 7:21-23) 하심도 "표면적"인 것으로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경우다. 



"표면적(outwardly)"인 것과 "이면적(inwardly)"인 것을 스스로 구별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늘 이 시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냐 아니면 나 자신을 위해 살고 죽는 것이냐(롬 14:7-9) 양심대로 판단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바울 사도가 이런 면에서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고 한 대로 항상 유의하여 자신을 편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다"(고전 9:26,27) 함과 같으며, 이 경고 즉시 이스라엘 광야 교회의 예를 들어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났지만"(고전 10:1) 당시 "그러나 저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은"(민26:65/고전 10:5)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으니 사안이 심각성을 재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세상은 저주의 질서 아래 있어ㅡ생명의 질서 아래 있다고 착각하는 모든 이에게 화가 있다



성경은 처음부터 그 진실성을 자체 증명해 왔음이니, 거짓말은 그 속성상 듣기에 달콤한 말로 접근해오는 것이지 절대로 쓴 소리 귀에 거슬리는 말로 가까이하는 법이 없는데 성경은 쓴 말부터 먼저 하고 쓴 소리로 끝난다. 쓴 소리,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는 경우는 특별히 적대 감정이 있거나 그런 관계에 있을 때 한하는데 그런 것 전혀 없이 사랑으로 말하고 좋은 감정으로 이야기하면서 쓴 소리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할 때, 거기에는 한 톨의 거짓말도 개입할 여지가 없음은 몇 번이나 강조해도 좋다.

너는 죄인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악인이다, 죄를 회개하라 등의 소리는 결코 듣기 좋은 말이 아니다. 그뿐인가, 죄를 회개하여 의인이 되면 이 악한 세상에서 당당한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는다고 분명히 말씀하셨고 세월이 갈수록 정도는 더 심해지고 결코 완화되지 않는다고 미리 경고하시면서 마음을 다잡으라 하셨다. 사탄은 성경의 이 진실된 색깔을 흐리게 하려고 가짜를 만들어놓고 그것이 참된 성경 해석인 양 속여 왔다.

즉 세상에 군림하는 종교를 만들지 않나,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 받아 잘 먹고 잘 입고 잘 산다고 속이지를 않나, 그래서 기독교가 세상 최고 유수의 종교가 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니, 성경에 그런 쓴 내용이 있지만 괜히 헛소리라고 믿게끔 해놓은 것이다. 그래서 어렵다, 난해하다 해서 성경 자체를 읽으려 하는 마음을 효과 있게 지금까지 차단시켜 오는 데에 성공했었다. 사탄이 간악하기보다 인생이 너무 어리석다고 해야 바른 해석일까, 둘의 합작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해석이라 할 것도 없다. 어렵거나 소견이 분분할 때 해석이라 하는 것이지 그대로 알아들으면 되는 것을 가지고 억지로 말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즉 이 한 가지 사실 즉 쓴 소리로 일관하는 성경이라고 마음 속에 깊이 묻어 두기만 해도 사탄의 온갖 공격을 물리치는 데에 100% 효능을 발휘할 것이다. 예로부터 말하기를 양약(良藥)은 쓰다고 했었다. 적 그리스도의 출현은 달콤한 말로 시작하는 것이 특색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거짓말이요 속임수이기 때문이다. 즉 지금 당장 이렇게 저렇게 하면 세상이 좋아진다든가 죽지 않는 초자연계 육체가 된다든가 등등의 너스레를 떨 것이다.

왜 성경 즉 진실과 진리에 속한 것이 쓴 소리를 하고 달콤한 것을 앞세우지 않느냐 그 이유가 있다. 처음부터 세상은 인간(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저주 받은 죽음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애초에는 축복하셨다. 그러나 그 후 범죄함으로써 저주가 임한 것이다. 고로 축복과 저주가 함께 병존하는 것 같게 보일지라도 나중에 온 죽음의 저주가 앞서 있던 축복을 번복시켜버린 형상이라 저주가 주류를 이룸이다.

그러므로 이 엄연한 현실이 되어 있는 저주를 무시하는 그 어떤 것이든 거짓이요 속임수이지 진리 진실일 수 없다. 힌두교의 고행(苦行), 불교의 고해(苦海-세상을 보는 관점), 무상(덧없음) 등의 강조는 그 원인을 무시하고 다시 말해 원인이 있는 결과로는 보지 않고 처음부터 이런 것이 있어 온 양으로 착각하는 미망(迷妄)에 속한다. 아니라면 이 세상 신의 책동으로 만들어진 미신일 뿐이다.

모든 것이 인과 관계라고 말은 하면서도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이 사실을 부정하니 수박 겉 핥기 또는 아전인수 격의 둘러대기, 같다 붙이기에 불과할 뿐이다. 모든 것은 인과(因果), 주종(主從), 대소(大小) 관계에 있다는 3위1체 원리에 비추어보지 않더라도 상식적으로 능히 판단할 수 있는 일을 가지고 억지로 부인하니(현재의 세상 모든 것 즉 죽음과 고난 고통 등이 '원인'이 있는 한 커다란 '결과'라는 사실을) 여기서도 진실과 거짓의 분기점이 드러난다.

고로 이상의 사실로써 성경이 진실 진리의 기록임이 이미 입증되어 있는 것이니, 3위1체 원리니 3운법칙이니 하는 것 모두 이 기본 증명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고 단지 방증(傍證)에 그칠 따름이다. 사실상 성경은 이런 것도 필요 없는 것이다. 다만 "과학, 과학" 하면서 지식을 자랑하는 이들에게 그런 어리석은 교만을 버리고 진리로 돌아오라는 뜻으로 이런 것까지도 밝히시고 알려주심으로 회개하라는 명령을 마지막으로 온 세상에 전달하시는 것뿐이다.
 

왜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생명)을 사랑하면 잃고 미워해야 영원히 보존하게 된다 하셨을까.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그대로 따르면 되는 것이니 무슨 토를 다느냐 할 것이 아니라, 이유 없는 말씀을 하실 리 없으니, 시험하기 위한 방편으로만 그렇게 말씀하실 리도 없다. 다시 말해 저주 받아 생명이 아닌 죽음에 속한 세상이니까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니 생명을 사랑해야지 죽음을 왜 사랑하겠는가.

죽음의 세상이라면 그냥 폐기되면 그뿐이지 왜 지금까지 존속하고(존속하기 때문에 불교와 같은 종교가 위와 같은 이유로 버젓이 행세하고 있지만) 있는가 할 때 생명 누림이 아닌 다른 목적이 있음이다. 그 다른 목적이 다름아닌 죽은 사람 다시 살려내는 생명의 일, 하나님의 사업에 진력하라 하심이다. 이 사람 살리는 제사장의 일은 하나님의 말씀만 전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니, 기도가 있어야 하고 이 기도를 뒷받침하는 것이 제물로서의 고난 받음인 것이다(롬 12:1).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신 것처럼 희생 제물로서의 고난 고통 죽음이다.

모세 율법의 희생 제물에 관한 제도(그리스도를 상징하는)가 생기기도 전에 하나님은 자연계에 속한 양을 죽여 그 피 묻은 가죽으로 아담 부부의 벌거벗은(초자연계 육체의 영광이 사라지고 자연계 육체로만 남는) 몸을 가려주시는 옷으로 해 입히신 것이다. 비록 자연계 생물이지만 일부러 그 생명을 강제로 끊으셨다는 데에 크나큰 중요 의미가 있는 것이니 자기 때문이 아닌 남(인간)을 위해 희생된 첫 사례 곧 제물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언제까지나 향유할 생명인데도 강제로 끊기는 비극은 범죄로 죽음(영원히 살고 결코 죽지 않게 창조된 생명이 끊기는)에 이른 인간의 비극에 한 몸 체제(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을 머리로 하는 몸으로서의 기능인 것)를 기반으로 하는 동참함 즉 하나로 함께 합류(合流)함인 것. 여기서 가인과 아벨의 인식의 차이가 드러난 것이다. 아벨은 아담으로부터 들은 대로 양의 희생 제물적 성격의 죽음에 대해 남다른 감회가 깊어 양치기 일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하나님은 그러한 의미에서 가인의 예물(첫 농사의 첫 수확)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예물(인간의 죄로 인해 죽임을 당한 그 첫 희생 양의 선례를 따른)을 받으신 것. 그러면 가인으로서는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았든 처음부터 알았든 간에 하나님께서 양을 바치는 예물을 기뻐하심을 보았으니 자기도 그 다음부터는 양으로 예물(제물)로 드리면 되는 것뿐인데 쓸데없는 시기심이 발동하였던 것이다.

어쨌든 이로부터 인간의 범죄의 대가로서의 저주와 죽음과 결부된 제물이라는 개념이 생긴 것이다. 물론 이는 장차 하나님의 아들께서 하나님의 희생 양으로서 인간을 위해 죽음을 당하시는 그렇게 함으로써만 인생에게 구원(영생에로의 복귀)이 가능해지는 뜻을 명백히 나타내심이었다. 가인이 아우 아벨을 아무 이유 없이 즉 자기에게 아무런 손해를 끼치지 않았음에도 자기 손으로 죽게 만드는 살인극의 비극도 비극이지만 이와 같이 죽을 필요가 없는 생명체까지 죽음을 맛보아야 하는 저주(죄로 인한)의 소용돌이 속에 신음하는 세상의 참극이 비롯된 것이다. 이 비극적 저주의 현상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는 이 사실을 지금 설명하는 것이다.

성경에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롬 8:21)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이 자연계 생물도 처음에는 썩지 않는 것이었는데도 아담의 범죄로 저주를 받아 이렇게 된 것일까. 왜냐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악인들이 들어가는 곳에서는 불도 꺼지지 않고 구더기도 죽지 않는다 하셨기 때문이다(막 9:48). 최소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때가 되면 구더기도 불멸이 된다. 이 점 마음에 간직해둘 만하다. 이 정도로써 이 세상이 저주 받은 것이 명백할진대, 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디서 생겨나겠는가. 싹 가셔버린다 해도 좋은 것이다. 저주 받은 세상 사랑하여 무엇을 어찌하겠다는 것인가. 전연 이유가 없다. 

이 모두 하나님 지으신 피조물이 한 몸 체제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지체라도 고통 당하면 나머지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당한다. 성경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설명하여 강조해놓고 있다(고전 12:26). 피조물과 하나되신 하나님 친히 고통 받으시는 사실을 또한 강조하고 있다. 그 명백한 증거가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 죽으심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과 하나이시므로 친히 그 십자가 고통에 동참하심은 물론이다.

다시 역설하지만 지금까지도 이렇게 저주 받은 세상이요 그래서 고통 고난 죽음의 세상인 것이다. 이런데도 이 원인을 알려고는 않고 처음부터 세상은 이런 것이라고 가르치는 종교는 얼마나 황당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것인가. 그런 종교는 사탄에게 눈이 감겨져(고후 4:4) 보지 못해서 그러하지만, 성경도 알고 하나님도 믿는다면서 세상에서 축복 받아 살 수 있다고 믿는 "기독교"라는 이름의 종교일진대 더욱 가증스럽다고 하지 않겠는가. 사탄에 꺼둘리기는 똑같은 것이다.

고난 받음은 죽음에 속하여 저주 받은 결과로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에서 이런 것은 애당초 없었다. 아담의 범죄가 유발시킨 자업자득형의 결과물 즉 대칭 관계로서의 비생명(생명과 대립되는 개념) 현상이다. 또 저주이면 저주요 죽음이니까 죽음 일색이지 거기에 생명이 섞일 이유는 없다. 고로 지금 이 세상은 저주, 죽음, 고난 일색이지 원천적으로 생명의 낙이 끼일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때는 죽음의 심판의 때가 아니라 비록 죽음이지만 은혜와 구원의 때로서 생명이 역사하는 때다. 그러나 이는 생명의 환락과는 차원이 다르다. 죽음의 때이지만 생명의 은혜가 있다는 뜻이지 생명의 때로 접어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을 새 창조(다시 출생케 함)에 의하여 탄생시키는 때이므로 현재 "저주 받아"(창 3:16) 있는 상태를 기준하여 이 구원의 역사를 산통(産痛), 산고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 낳은 기쁨은 차후의 일이고 지금은 그런 고통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아이 낳는 고통은 강제가 아니고, 고통인 줄 알면서도 부부가 서로 교합하여 일어나는 일이므로 "자원(自願)"이라는 원칙이 세워질 수밖에 없다. 이 스스로 택하여 얻는 결과이기 위해서는 즉 강제가 아니기 위해서는 그 고통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열려져 있어야 하는 것. 그래서 스스로 원해서 '이루어지는'('당하는' 것이 아닌) 고통의 의미가 된다.

고로 자원해서 받는 저주의 고통이기 위해서는 역시 자유 선택으로 고난 받지 않아도 되는 상태(이상 설명과 같은 한 몸 체제로서의 고통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뜻에 불복하는, 악인을 함정에 빠뜨리는 역할로서의)라는 여백이 반드시 필요하기에, 이 세상이 생명과 죽음, 고통과 쾌락이 섞여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까닭이 된다.

때문에 전적으로 고난, 고통, 저주, 죽음으로서의 원칙뿐이지만 그렇지 않은 면도 함께 병존하여 이상의 취지가 수행되도록 하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정상적으로 원칙을 따르는 것이 고난과 저주, 죽음인 것이다. 그래서 순종을 거부하는 악인들이 빠져드는 함정이라 할까 그런 것이 이 세상에서의 "위로"이다. 이 "위로"(눅 6:24/16:25)라는 말은 원칙적으로 이 세상이 그런 위로가 있을 수 없는 고난과 죽음만이 있다는 뜻을 웅변함이다.

그러므로 이 산고, 산통이 정상적인 모습을 띠고 생산적이기 위해서는 자원 자진해서 받는다는 취지이어야 하고, 그렇게 되자면 고통 아닌 위로 비슷한 것이 있어야 하고 그 둘을 양자 택일하는 양상이어야 하기에 생명 아닌 생명 같은 것이 있는 것이니 이는 말할 필요도 없이 이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불복종의 악인들이 스스로 빠지는 함정, 덫, 올가미 역할을 한다고 한 것이다. 즉 한 때의 일시적인 찰나와 같은 생의 쾌락일 뿐이다.

생명은 영원한 것이어야 하는데 이런 찰나적인 성격이라는 것은 비정상이라는 것이 명확히 드러나는 것임데도 악인들은 욕심에 눈이 어두워 이를 분간할 줄 모르는 것이다. 분간하기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일종의 말하자면 자기 꾀에 걸려 든 셈이다. 그래서 함정이라 하는 것. 악인을 걸러내기 위한 이런 함정에 걸려 드는 것은 실로 만고에 없는 어리석음이 된다. 고로 이 세상에서의 고, 낙이 양면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저주 일색이지만 새 창조라는 시기의 특성상 생의 낙이 존재하는 것처럼 비쳐지는 현상일 뿐이니, 이런 신기루(사막의)에 걸려 들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죽음의 사막 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오아시스 같은 것이 보이더라도 신기루일 뿐이다. 이런 사막 위에서 이런 신기루에 취해 있는 이들에게 진실로 화가 있다. 재앙을 자초하는 결과가 되니 극력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앞에서 밝힌 대로 사람 살리는 일의 의인들의 고난은 자발적으로 받는 것이므로 이 양자 택일의 성격상 위로처럼 보이는 것이 신기루처럼 비쳐지고 있는 세상인즉 고난 받는 이들은 기쁨으로 당할 것이요 억지로 당해야 하는 것처럼 착각하지 말 일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 그대로다. 멋모르고 웃는 것처럼, 이런 현실 속의 세상인즉 참으로 웃을 일이 없는 것이다. 있다면 울 일밖에 없는 것이니 이런 비참한 실상을 아는 자로서 어찌 그렇지 않다 하리요. 실상을 제대로 눈 뜨고 보는 일이 중요하다. 몰라서 그렇지 알고 있는 다음에야 과거 모르고 지내던 일이 반복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죽음과 저주의 세상이 단 하루도 지탱하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오직 이것이 산고, 산통 즉 새 생명 탄생의 시기인 고로 그래서 잠시 지체하는 것뿐이니 이 해산의 시기가 끝나면 세상도 즉시 끝난다고 하셨다.

그래서 새로 탄생한 생명은 그 생명을 누리는 때로 영원히 이어지고 그 반대 방향으로 취사 선택한 경우이면 그 반대의 것을 스스로 택한 그대로 영속되어져 나가는 것뿐이다. 이로 보건대 어찌 아니 두려워하리요. 어찌 떨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 시대를 정확히 알라는 것이 우리가 온 세상에 알려야 할 유일한 메시지다. 이러한 세상에서 자기를 위하여 부를 축적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재앙이 되는지 알 수 있는 일이다(막 10:25).

오직 그 부를 나누어주기 위한 잠시 맡은 것으로 여길 때 즉 실상을 바로 보았을 때 그런 위험에서 벗어난다(딤전 6:17). 잠시 맡은 것일 뿐이니 마치 자기 것인 양 축내서도 안된다. 이렇게 남의 것을 잠깐 맡아 있음을 자각할 경우에만 "사람으로는 할 수 없되 하나님께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막 10:27)라는 말씀이 적용될 뿐이다. 이 세상은 죄인이 된 인간의 세상, 죄인으로서 형벌 받는 형벌밖에 받을 것이 없다고 선언이 된 세계다(창 3:15-19). 이것이 말씀을 더 이상 거역하지 않고 따르는 정상적인 자세다.

주님께서 "이제 웃는 자는 애통하며 울게 될 것"(눅 6:25)이라 하신 것은 "위로"(:24)나 "부유함"(:24)과 같은 맥락으로서, 이 세상을 이상 설명과 같은 저주 받은 상태로 보지 않고 정상적인 창조 당시의 삶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을 지적하여 경고하심이다. 무조건 부유한 자는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니, 바울 사도가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셔서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다"(딤전 6:17) 한 그대로다. 사람이 웃는다고 해서 "저 사람은  경건하지 못하고 세속적인 사람이라" 하고 저울질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식으로 잣대를 들이다는 일이 많으니, 형식이야 물론 중요하지만 그와 같이 겉모양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많은데 실속은 외면하고 그 대신 형식에 치우치는 것은 자아중심의 한 형태가 되는 것인즉 주의를 요한다. 교회에만 무조건 충성되게 나가면 믿음이 좋은 것으로 분류하는 것도 이런 유형에 속한다. 

이런 저주의 대상이 되어 있음을 알고 아담은 여자의 이름을 즉시 지어버렸다. 전에는 이름을 지을 수가 없었으니 자기의 닮은꼴이므로 그냥 아담으로만 통했던 것이니 둘이지만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 인격적으로 대하여 여자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여겼던 관념이 사라지고, 마치 단순히 사람 제조기처럼 인식되어 전에 영물들 이름 짓던 것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다스리게" 되어 있는 저주대로 된 것이다.

이는 여자가 당연히 먼저 남자와 의논하고 선악과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함에도 독단적으로 행동을 취한 후 남자에게는 자기 의사를 따르라는 식으로 나온 것이 화근이 되어 빚어진 결말이므로 여자로서도 할 말이 없었다. 하나님 친히 여자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면 여자가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전자는 후자의 자식 벌로서 위계 질서가 분명했고 따라서 여자의 행동은 손아래가 손위를 넘보는 식이 되었은즉 남자가 여자를 강압으로 다스림은 불가피한 결과일 수밖에 없다.

이 모두 죄의 결과이니 죄는 질서의 유린, 파괴 행위인 것. 여자의 그런 행동은 선례를 남기는 것인즉 지속적으로 행해질 개연성이 충분하여 남자는 또한 이를 제지함의 악순환이다. 남자(아담)는 남자대로 머리이신 하나님의 뜻, 명령,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여 어겼으니 질서 유린 행위라는 의미에서는 여자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성경에서 남자를 주로 하는 것은 이러한 여자를 비하해서가 아니라 (남자도 똑같은 범죄를 한 마당에) 남녀 한 몸 즉 둘이 하나됨에서 남자의 대표성을 따른 것일 뿐이다. 왜냐면 아담이 맨 처음 창조되었고 그 아담을 소재(즉 아담의 갈빗대)로 하여 여자가 지으심 받아 아담을 위해 창조되었으므로 처음부터 '하나'의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하나이므로 머리가 그 대표성을 띠는 것이다. 우리가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함과 같은 이치다.

영원한 세계에서는 이런 성별이 사라짐은 당연하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초자연계 몸으로 만약 부활하게 된다면 이런 구분이 없어지는 것은 물론이다. 마지막 아담께서 남자나 여자나 모든 사람의 짝으로서 마치 육체에 대한 영혼처럼 각 사람과 이중 구조로 되어 존재하시는데, 그리스도께서 남자시라면 그러면 내가 남자라야 하는가, 여자라야 하는가. 그리스도께서 남자로 세상에 오신 것도 위에서 말한 그런 대표성을 따라 되신 것뿐이다.

여전히 남자로 계시면 남자 선호 또는 우월성을 나타내는 의미일 것인즉 여자가 원망하게 될 것이요 여자이시라면 여자 우대 또는 편애가 되어 남자가 원망할 것이니 수시로 성을 바꾸시겠는가 어쩌겠는가. 고로 그런 성별은 다시는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애당초 인간(아담)이 창조될 때 성별이 없었다. 천사들과 같은 몸으로 될 것이기에 이는 당연했다. 처음부터 남자였다면 의당히 그 짝으로서 여자부터 창조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에덴낙원을 창설하신 다음에야 "혼자 지내는 것이 좋지 않다" 하신 것이다. 그리고 나서도 여자 창조가 아니라 영물(靈物)들 곧 천사 즉 초자연계 존재 창조였고 그 중에 아담의 마음에 드는 자가 없으므로 그제서야 여자가 생긴 것이다. 영원 생명의 세계에서는 모두가 여자처럼 아름답고 남자처럼 늠름하여 양쪽이 조화된 절묘한 모습을 갖추게 된다.

평등하게 모두가 그런 훌륭한 모습들로서 절세 미인, 절세 가인으로서 미와 추의 구별이 없어진다. 그럼 모두가 거의 똑같으니 그 많은 사람이 어떻게 서로 식별이 되어 알아보느냐 하겠는데 그야 초자연계 몸이 초능력이니까 지금 우리가 아는 컴퓨터 이상으로 뛰어난 식별력이 있을 것이야 불문가지. 자꾸만 현재의 이 자연계 몸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데 이를 불식시켜야(고후 5:16,17).

말을 맺으면, 오늘의 이 세상은 오직 새 창조, 다시 출생하는 데에만 소용되는 것으로서 삶을 향락하는 즉 사는 때가 아니라는 것이니 저주 받은 주제에 무슨 삶의 누림과 즐김을 감히 상상할 수 있으리요. 무리요 억지가 아닌가. 지금까지는 몰라서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제는 불을 보듯 훤하게 알았으니 불나방인 양 불 속으로 뛰어드는 만고에 없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말 일이다.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영원 멸망 속으로 영문도 모르는 채 쾅쾅 넘어가고 있는 현실인데도 이를 외면하여 이 위급함을 경고해줄 마음은 없이 안일 속에 묻혀 세월이 가는 줄도 모르게 세상 술에 취해 있다면 그 결말은 불문가지이다. 똑같은 운명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 여부를 시험해보시기 위한 단지 그것 때문에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 것이다.

설혹 그런 의미로 되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기꺼이 그 말씀에 응할 것이 아닌가. 하물며 이와 같이 이치가 맞아 명약관화의 사실임을 성경을 통해 알면서도 이를 거역한다면 이 경우 이미 희망은 거의 끊어진 것이다. 이런 것이 고범죄 즉 알면서도 짓는 죄에 속함이다. 모든 인간에게 양식(良識)을 주신 하나님이 상식을 벗어난 것을 지시하시거나 명령하시는 일은 없으니 안심할 일이다.

따라서 왜 세상에서 악인이 형통하느냐 하나님이 없어서 그런게 아니냐 하여 하나님을 믿지 않는 핑계로 대는 이가 많은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까닭이다.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시 7:11)이라 한 대로 이미 하나님의 저주는 꽉 차게 내려져 있는 터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의 판단과 달라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줄 모르는 까닭이다. 죄의 경중이 없이 자아중심은 본질적으로 모두가 다 살인자로(롬 3:15) 사형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런즉 "아들을 순종치 않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는"(요 3:35) 것이다. 이 진노를 벗어나는 것이 인생으로서 화급하지 달리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실상을 몰라서 이것저것 관심을 가지는 것뿐이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이런 실상을 설혹 안다고 해도 의미가 없었으니 피하려 해도 피하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허물치 않으셨다 했는데 즉 심판 자체가 불가능했음이니 모두가 다 똑같은 죄인이므로 심판을 하나마나인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구원의 길이 만인 중에 개방됨에 이르러서야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회개하라 하신 것이다(행 17:30). 그런즉 이 하나님의 저주, 진노의 사실부터 알아야 하는 것이니, 이 곧 모세 율법이 그리스도 오시기 전 사전(事前) 교육을 시킨 기본 내용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음을 자각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구원이 발동될 수가 없음이다. 그래서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왔다"(눅 5:32) 하셨다.

때문에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이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먼저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 그냥 믿기만 하면 영생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일절 무의미한 시간 낭비만 된다. 빌립보 간수처럼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내가 어찌 할꼬 하는 비명이 나와야(행 16:30/2:37) 그리스도께 나오게 되는 것이다. 고로 이런 참담한 현실을 자각하여 떨고 있는 자에 한해서 복음(희소식)이지 그렇지 않고는 병 없는 자에게 의사가 필요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가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 모세 율법이 충분히 그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이유다.


"하나님의 저주 내리심"에 대해 반문하기를 노아 홍수 이후에도 "하나님이 복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신 대목이 있지 않으냐 한다면, "그렇다고 이미 내려진 저주가 철회되었던가, 여전히 남자는 이마에 땀 흘려야 하고 여자는 해산의 고통이 있지 않은가" 하고 반문하게 된다. 저주는 그대로 있으면서 단지 홍수 때처럼 멸종하다시피 하는 것은 없이 말 그대로 생육하고 번성하는 데에만 그치도록 제한된 범위 내의 "축복"인 것이다. 즉 이 축복은 앞선 저주(대홍수에 의한 멸절)에 상대되는 의미로만 한정되는 것이었다. 

성경의 진실성(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을 보증하는 성령의 서명 날인


요한 사도가 그 복음서 말미에 유별난 것으로 들릴 수 있는 한 에피소드를 삽입해 놓았다. 왜 이런 특이한 대목이 끼워져 있을까 의아해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간략하게 거두절미해서 요점만 기술하는 성경 기록의 특성으로 보아 필요없는 내용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도 들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것이야말로 이 복음서의 최종 결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성경이 모두 진실 그 자체라는 성령의 서명 날인이다.

요한이 의식적으로 이것을 썼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자기도 모르게 다시 말해 성령의 감동으로만 처음부터 끝까지 이 복음서를 기록했다 볼 수밖에 없으니 따라서 이는 성경이 진실 그대로의 기록임을 자체 증명하는 또 한가지 사례가 됨을 우리는 주목한다. 즉 그런 뜻으로 이와 같은 내용이 삽입되었다고 판단하게 된다. 

만일 이 요한복음서가 인위적으로 지어낸 이야기로서 처음부터 거짓말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지어내고 있다는 의식이 항상 작용하는 관계로 그렇게 속이기 위한 목적 이외의 것으로서 감히 더 이상의 군소리를 보탤 엄두를 내지 못하는 법이다. 이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다시 말해 요한 복음서의 말미에 적힌 바와 같은 그런 잣단 말은 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이런 말이 자연스럽게 끼어 든 것은 요한이 처음부터 기록한 모든 것이 그가 직접 보고 듣고 확인했던 사실뿐이었음을 강력히 방증하는 것이다.

또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음을 웅변으로 나타내는 자체 증명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성령께서는 이런 식으로써, 요한이 지금까지 요한복음서에서 기술한 내용이 진실 그대로임을 서명 날인하시는 그런 형태인 점에 우리는 새삼 놀라워하는 것이다. 이렇게 요한 복음서만 서명 날인해놓으시면 요한 복음서와 비슷한 내용의 다른 복음서 그리고 기타 사도들의 서신들 모두가 같은 내용이므로 모두가 진실됨을 인(印)치시는[날인하시는] 것이 됨이다. 즉 요한이 거짓말하는 자가 되어 의식적으로 그런 거짓말을 꾸며대어 기록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다.

요한은 그 기억력이 비상했던 것 같다. 30세쯤 되셨던 예수님의 품에 가끔 기댈 수 있을 정도로 12 제자 중 가장 어린 아마 20세도 채 되지 못한 십대였을 수도 있다. 예수님과 이종간이었다고 말들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아주 젊어서 그런지 또는 남달리 기억력이 좋아 그런지는 모르나 다른 어느 복음서보다 그 행하신 일보다는 주님의 말씀들을 더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특점이 있다. 물론 모두가 다 요한 자신의 기억력에서 나온 것이라고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

기록한 후 나중에 다른 제자들에게 들려 주면 그 다른 제자들이 듣고 나서 "그것만이 아니고 이런 말씀도 그 때 하셨다" 하고 지적해 주면 요한 역시 그 말씀을 다시 기억해내어 끼워 넣는 그런 과정도 거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 친히 약속하시기를 "[성령께서] 내가 말한 모든 것을 기억 나게 하실 것이라" 하셨으니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만은 분명하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스데반의 성령 충만한 설교도 그렇다. 상당한 장문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요한 이하 모든 사도들이 들었을 것이요 그런 사도들의 기억들을 살려내어 그렇게 스데반의 명설교가 그대로 우리에게 전달되어 오는 것이다. 요한이 듣고 기억한 것을 누가가 직접 전해 듣고 그렇게 기록한 것이 아닐까. 아니면 누가 역시 듣고 그도 기억력이 비상하여 그 내용대로 옮긴 것일까. 물론 성령께서 친히 그 기억을 되살려 주시는 등 역사하신 것이야 언제나 변함없는 진실 그대로다.

요한이 그 복음서 말미에 기록해두고 있는 "잣단" 내용이라 하는 것은,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기를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는 그 부분이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라 했으니 예수님과의 친밀함을 과시하려고 이런 기록을 덧붙이지 않았나 할 정도다. 이 "제자"는 바로 요한 자신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사도들을 두고 그런 "자기 과시[자기중심으로서의] 운운" 하는 것은 넌센스다. 그만큼 이 말미의 기록은 위에서 지적한 대로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은 만세반석과 같은 중요한 의미가 스며 있으니 곧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성령의 서명 날인[signature]이다. 당시 사정으로 보면, 베드로가 수일 전 주님을 세 번 부인한 일이 있고 난 다음의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렇게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으므로 베드로는 주님께 대한 사랑의 감정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그런 순간이었다 하겠다.

주님만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고로 주님 역시 그런 질문을 던지신 것이리라. 그러면 내가 주님만을 사랑하는데 그런 나의 사랑을 받는 상대방이신 주님도 역시 같은 사랑으로 나만을 사랑해 주시기를 바라는 감정은 자연스럽다 하겠다. 다시 말해 자기에게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시는데 요한 역시 듣고는 주님을 따르는 것을 보고 약간의 질시(嫉視)하는 감정이 일어났다고 말하면 지나친 망상일까. 또한 평소 요한은 "주님의 사랑하시는 제자"로 표현될 만큼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제자이기 때문에, 그런 감정은 아니더라도 그 순간의 베드로에게는 요한에 대하여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해도 옳다.

질투란 것은 '나만을'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니 왜냐면 내가 '그만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속성이 그러하다 하면 너무 억단일까. "성령께서 시기하시기까지 사랑하신다는 말을 헛된 말(빈 말)인 줄로 아느냐"(약 4:5) 하고 성령의 사랑을 가리켜 야고보가 말한 바와 같다. 물론 이런 데에서까지 굳이 "질투"라는 말을 쓸 필요가 있느냐 할 것이다. 그러나 바꾸어놓고 생각해보면 이 "질투"라는 말을 쓰는 것이야말로 주님과 나와의 사랑이 그저 막연하고 모호하고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그와는 아주 반대로 실질적인 사람과 사람 사이, 혹은 남녀끼리의 사랑보다 더[삼하 1:26] 진한 개인적 감정이란 사실임을 이런 용어를 통해 강조하는 것도 무의미하다고는 못하리라.

이미 이에 대해서는 주님 친히 말씀하신 바가 있다. 곧 "사람이 그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하셨다. 내가 어떤 이를 나 자신의 전부를 다 바쳐 사랑했다면 나 역시 그에게서 같은 정도의 사랑을 기대함은 인지상정이니 왜냐면 그럴 충분한 사유가 되는 까닭에 그렇게 기대함은 무리가 아니요 이것은 자기중심과는 별개의 의미이다. 이기적인 측면에서도 이 시기나 질투라는 것을 이해하기도 하지만, 이런 '둘이 하나 되는 사랑'의 속성으로도 이와 같은 해석은 충분히 그 타당성이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각자에게 임하여 계심으로써 각 육체에게 영혼처럼 위치하시어 불가분의 관계가 이루어져 있으니 그런 유(類)의 욕구에 대해서는 이의 없는 100퍼센트 만족도다. 고로 그런 점에서는 더 다시 그런 감정이 믿는 형제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누구는 더 여기시고 누구는 덜 여기시고 하는 것 없이 전부가 완전한 사랑의 평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베드로의 물음을 받으시고 주님께서 대답하신 것은 역시 언뜻 보기에도 동문서답처럼 비쳐질 수 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할지라도 네게 그것이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내가 그에게 무슨 말을 하고 무엇을 어떻게 하라 하든 그런 것은 그와 나와의 관계(사랑 즉 개별적인 사랑-요한과 주님과의)이고 너는 네 나름대로의 너만이 가진 너와 나만의 관계(사랑 즉 '또 하나'의 별개의 사랑-베드로와 주님과의)가 중요하고 그것만이 네게 중요하고 한도 없이 충분하고 다른 것은 네가 상관할 필요가 없지 않으냐" 하시는 뜻이라 하겠고, 그래서 다시 "나를 따르라"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랑하시는 베드로에게만 주시는 사랑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여기서 이 글을 통하여 성령께서 강조하시는 사실은, 개개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각자 개개인에게 지극히 만족한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도록 사적(私的)이고 개별적인 사랑이시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셔도 그러하시다는 것이다. 사람은 물론 이렇게 할 수 없다. 당장 삼각관계가 되어 버리고 질투와 시기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왜냐면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오직 한 면으로만 바라보는 얼굴을 지니고 있음과 같다. 그 쪽을 보면 다른 쪽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너는 나를 보고 나는 너를 보는 가운데에서의 일대일의 사랑이다. 그 둘의 사랑에는 다른 제삼자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다.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다르시다. 그렇게 일대일의 사랑을 하실 수 있으면서도 그런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동시적으로 동일하게 베푸실 수 있다는 이 사실을 이 대목은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이 다른 차이 혹은 하나님의 특성 중의 하나가 된다. 마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처럼 그런 완벽한 일대일의 사랑이심과 동시에 그러면서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그러하시다는 점에서 그렇다. 바로 이런 극히 핵심적인 사실을 이 간단한 에피소드로써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것이다. 이제는 주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심으로써 비로소 명실상부한 것으로 가능하게 되었다는 뜻은 아니고 처음부터 이것은 하나님의 특성인 것이다. 단지 이 경우 그 사실을 다시 확인해 주시고 강조하신 것이다.

때문에 요한 사도 역시 그저 담담하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말씀 그대로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시는 의미뿐이었다고 일반적으로 그 복음서 내용에서 좀처럼 설명을 가하지 않았던 "설명"까지 곁들이고 있을 정도다. 왜냐면 쓸데없는 오해를 사람들이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오해 풀기라면 그것 하나만 가지고 이 복음서 기록에 일부러 기재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런 오해는 지내놓고 보면 다 사라지고 말 한낱 부질없는 생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 일개인에 관한 오해를 풀어주는 차원의 해명이 아니기 때문에 즉 성령으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이 장면이 이렇게 기록되었다고 하는 이 점이 중요하다. 고로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은, "너만을 사랑하는 내 사랑은 내가 너 외의 그 누구를 너처럼 사랑하든 상관없이 '한 사람'으로서 너만을 사랑하는 그 의미 그대로이니, 이 점에 관해서만은 네가 백 번 믿어도 좋고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시다.

여기에 우리 믿음의 핵심이 있는 것이다. 곧 '나와 하나님과의 사랑'이다. 너만 사랑하고 나만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사랑과 똑같이 그렇게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심을 다시 강조한다. 그러므로 나와 하나님과의 사랑 관계는 극히 개인적인 것이고 때문에 나의 삶 자체가 되는 것이다. 단지 구원만 얻는다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나의 순간순간의 삶으로 융화되어 나타나는 그런 사랑이니 곧 내 생명의 핵이 됨이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단 한 순간도 살 수가 없는 나의 존재 자체를 의미함이다. 이렇게 둘(주님과 나는 엄연히 둘이 아닌가)이면서도 하나요 하나로 보이면서도(나 혼자만 있는 것처럼 보이나 또는 주님 혼자만 계시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는 둘[주님은 나와 함께, 나는 주님과 함께 존재하는]로서 존재하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 존재이기에 성경은 "새 피조물"이라 하고 "성령으로 다시 출생한다"고 한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내린 결론에 좀 더 설명을 덧붙이면, 그 요한복음 21:18-25의 줄거리는 이렇다.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여쭈니,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셨다.

이 대목이 우리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순전히 베드와 요한에게만 관련된 개인적인 이야기인데도 수록되어 있다는 바로 이 점을 가리키고 이 대목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 하셨는데 왜 요한이 따랐을까. 그러면 또 베드로는 그런가보다 하면 되는 것이지 왜 주님께 "이 사람은 어찌 되겠습니까?" 하고 여쭈었던가. 또 주님의 대답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언정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시는 것이었으니 왜 그럴까.

나중에 요한도 이를 설명하기를 거기에는 아무 의미도 없고 단순히 주님 하신 말씀 그대로의 의미뿐이었다고 했다. 물론 요한은 주님의 이 말씀을 인해 당시 자기에 관해 떠돌던 말들을 여기서 단박에 해명하여 해소하고자 이 대목을 일부러 삽입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베드로가 어떤 심경에서 그런 질문을 했고 주님은 그런 베드로의 마음을 어떻게 간파하시고 그런 대답을 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질문을 하게 된 당시 베드로의 마음 상태는 과연 무엇이었나? 앞에서 설명한 대로, 필자는 그 초점을 베드로의 질투 같은 감정에다 두었다. 과연 그런가. 그것은 필자 개인의 상상 즉 편견으로 그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도 당시 베드로의 마음을 환하게 들여다보고 계셨던 주님의 대답에서 그 실상이 드러난다고 하겠다. 즉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시고, 앞에서 하신 말씀을 다시 반복하셔서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신 점이다. "내가 요한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하든 하지 않든 요한과의 관계는 요한과의 관계로서 요한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고, 너는 너와 나와의 관계 이상으로 네가 관심을 둘 사항이 없다"는 뜻이다.

베드로는 또 베드로대로 요한이 주님을 따르니까 [베드로 자기더러 따르라고 하셨는데도] 그렇게 여쭌 것이다. 요한이 따르지 않았다면 그렇게 여쭐 필요가 없다. 그러면 그렇게 여쭐 정도의 그 관심이 요한을 위함이었던가, 주님을 위함이었던가, 아니면 자기를 위함이었던가. 아니면 그저 부지중에 튀어나온 소리였던가. 그 어떤 심리 상태였을까.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그런 것에 관심 두지 말라는 책망과 비슷하신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와 주님과의 관계만 강조하신 것이다. 베드로의 부질없는 관심이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요한이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당시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과 요한과의 사이에 대한 베드로의 관심이다. 그토록 요한을 사랑하시는데 그리고 현재 요한이 어린 아이처럼 주님을 따르고 있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一여기에 베드로의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요한과 무슨 엄청난 일을 해 주고 눈이 휘둥그래질만한 말을 해 주든 너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너는 오직 나와만 상관 있다" 하시는 것이 주님의 대답이시다.

필자는 이 베드로의 "관심"을 질투에다 관점을 두었다. 그럴까? 암암리에 그런 질투 섞인 감정에서 그렇게 말이 나왔을까. 다시 말하지만, 베드로더러 따르라고 하셨는데 요한도 따라 나서니까 그런 말이 나온 것이다. 즉 베드로 자기 혼자에게 주신 개별적인 분부이신데 요한이 말하자면 옆에서 끼어 든 셈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것을 질투에 가까운 감정이라 판단해보았을 뿐이다. 이제 베드로는 요한 못지 않게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 위치와 시각에서 그렇게 요한을 보았으니 말하자면 경쟁의식 같은 것을 느낀 것이라 하면 역시 망상일까.

질투가 원래 그런 성질이 아닌가. 독점 의역이다. 그런 독점욕을 "질투"라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할 단어가 있는가. 요한 역시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더러 "따르라" 하셨지만 이미 요한의 발걸음은 주님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 간의 묘한 감정의 교차다. 필자의 판단을 유치한 생각이라 해도 좋다.  그러나 사랑은 원래 독점이다. 남녀 부부간의 육체의 사랑 곧 둘이 한 몸이 됨에서도 상대에 대한 독점이다. 제3자의 개입은 전혀 용납 않는다.

다시 말해 아내의 몸은 남편의 것이지 더 다시 아내 자신의 것이 아니다[고전 7:4]. 남편 외의 남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남편의 몸 역시 똑같이 아내만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완벽한 의미에서의 독점(獨占)임과 동시에 완벽한 의미에서의 공유(共有)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이시기 때문에 그러하다. 인간사에는 이런 일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역이다. 앞에서의 설명대로 하나님의 특성이시다.

고로 위의 설명에서 "질투"라는 용어에 대해 거북해할 이유도 실상 없겠다. 이 두 가지를 함께 담고 있는 의미가 하나님의 사랑이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필자가 여기서 나타내려는 것은 베드로도 그런 감정[질투와 같은 것]이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를 지적하려 함이 아니니, 앞에서 밝힌 대로 오직 주님과 나와의 가장 가까운 사이로서의 사랑을 밝히려 하고 강조하려 함이다. 하나님과의 개별적이고 사적(私的)인 사랑의 관계이니, 이는 한 몸된 아내 남편 사이보다 훨씬 월등하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증거로서 보이려 함이다.

이는 바울이 그 편지에서 이미 밝히고 있는 내용이다. 즉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뉘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한다"[:32-34] 한 것이다.

우리가 사람의 자식이라 하면 우리를 낳은 부모의 체질 그 육신을 그대로 물려받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 즉 하나님 자신을 나의 것으로 모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베드로는 "신성"(神性-신의 성품)이라 했다. 육신의 부모는 육체이기 때문에 그 육체를 내 것으로 하여 내가 태어나 그 자식이 되는데,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그 영 곧 성령을 나 자신의 일부로써 (왜냐면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선물로서 영원히 나와 함께 계셔 불가분의 관계에 계시니까) 영원토록 모시기 때문이다.

"요한에게는 요한의 하나님으로서 요한만의 세계로써 만족하고 너 베드로는 나와 너 베드로만의 사랑의 세계로서 너와 나만의 세계인즉 내가 요한에게 어찌하든 너는 신경 쓸 것 없고 오직 너는 나와의 사랑의 관계만 진척시키고 발전시키고 향상시키는 것만이 너와 나의 유일한 소관사로서 이보다 더 만족스러운 일이 또 있느냐" 하시는 말씀이 되는 것이다. 내게 있어서는 최고, 최선, 최상, 최신(最新)의 사랑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사랑의 특성은 항상 새롭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생명의 특성이기도 하다. 늘 새롭다는 감격 가운데에 있으므로 싫증이 없다. 그렇지 않은가一오늘이 어제가 아니었듯이 내일은 오늘이 아닌 것이다. 똑같은 판에 박은 듯한 날은 원래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이 그렇다. 사랑이 생명에서 배어 나오고 우러나오고 생명 또한 그렇기 때문이다. "사람이 혼자 지냄이 좋지 않다"[창 2:18] 하신 대로 혼자서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요 혼자가 아니라 둘 또는 그 이상이니, 사랑이 삶의 중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창세기 남녀 창조에서와 같은 우리말의 오역(誤譯) "배필"은 남녀개념이 아니라, 단지 돕는 자["helper"]라는 단어이다. 이제 요한의 그 복음서 말미의 수수께끼 같은 구절의 모든 의미가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가! 이렇게 나와 하나되어 계시는 분을 가리켜 요한복음에 보혜사(保惠師-흠정영역의 Comforter)라 하고 있는데 그런 '보혜사'란 거창한 이름으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는 역시 똑같은[창세기 기록과 같은] 의미의 그런 "조력자"(helper)로 표현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서로 하나가 되어 존재하는 구조(構造)에서의 그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는 상대방' 즉 짝의 개념으로서의 의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라 할 때 그 '영'이시라는 의미는 우리의 '육체'와는 그런 현격한 차이의 의미로서 앞에서의 설명대로 전체를 상대하시면서도 지극히 사적(私的)이고 개인적인 의미로 통하시는 각 피조물과의 관계다. 이것을 바로 다음과 같은 점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즉 베드로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나 개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심이다.

"내가 요한에게 무슨 말을 하든 내가 요한에게 무슨 일을 해 주든 그것이 네게 아무 상관도 없다. 사람이 그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림보다 더 큰 사랑은 없고 나는 너를 위해 목숨을 버렸으니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너를 한시도 떠날 수 없어 너와 영원히 하나되어 함께 살지 않느냐. 사람인 나로서 너를 위해 이 이상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것이 내가 사람이 되어 있는 이유이다. 그러나 내가 동시에 하나님인 줄을 알라. 하나님으로서 나는 요한이나 기타 모든 사람 그 어느 누구든지 너를 사랑하는 것과 똑같은 사랑으로 사랑을 베풀 수 있다. 육체인 사람에게는 이런 일이 불가능하되 육체가 아니라 영인 하나님에게는 이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네가 언제나 명심할 것은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를 가까이 하시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네가 나를 부인하면 나도 너를 부인할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나는 너와 영원히 함께 있고 또한 요한을 비롯해서 모든 다른 사람들 곧 너희들과 영원히 함께 있는 것이다. 요한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무엇을 해 주든 그것이 네게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나를 따르라'는 말은 네게 내가 한 말이다. 네게 다시 말하거니와, 너는 나를 따르라".

사랑하는 이를 위하고 사랑하는 이를 섬기고 사랑하는 이의 뜻대로 해 주는 것 자체가 무한한 삶의 낙을 누리게 하고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육체가 마시고 먹을 때에 느끼는 낙만큼이나 큰 낙인 것이니 생명의 근원적인 낙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먹고 마시는 것은 육체에 관해서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것이지만, 영적인 것은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므로 우리가 능히 측량할 수 없는 굉장한 낙일 수도 있다. 사랑은 이런 모든 육체의 낙을 능가하고 초월하는 것이고, 또한 영계에서의 사랑은 이런 자연계에서의 사랑보다 훨씬 뛰어넘는 쾌락인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해할 때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이든 하는 것 자체가 우리 육체가 누리고 느끼는 그 쾌락과는 비교도 안되는 전혀 다른 차원의 낙을 느끼게 됨이니 이는 너무나 자명하다. 이 사실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하신 말씀과 "나의 먹을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 분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라" 하신 데에서 잘 드러난다.

단지 이 세계는 그런 정상적인 생명의 낙이 통할 수 있는 생명의 세계가 아니라 오직 육체적인 낙 그런 흙으로 돌아가는 육체의 생명에서 느끼는 낙만으로 한정되어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정작 영적인 생명의 낙은 누릴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의를 행함으로 인한 보람에서 오는 기쁨과 평안 정도이나 이 역시 사람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극대화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이는 그 사람 스스로 얼마나 사랑하느냐 하는 그것으로써 결정되는 것으로서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은 아니다. 오직 각자의 믿음 나름이요 사랑 나름이다.

"나를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요 6:48-58] 하실 때 바로 이 먹고 마시는 것 자체가 낙이 되면서 또한 삶의 법칙을 준수함[먹지 않으면 죽으므로]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서 먹는 것 자체가 낙이기 때문에 먹고 마셔 생명을 유지하는 것처럼 하는 게 아니라 다시 말해 낙이기 때문에 먹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는 낙으로 나타나지 않아도 오직 그 일이 옳기 때문에 즉 사는 법이요 원리이기 때문에 비록 그런 자연스러운 낙을 현재 이 시간은 느끼지 못해도 의지력으로 (이것이 자연계의 법칙을 따르는 육체의 낙만을 따르는 동물 같지가 않고 지, 정, 의로 행동하는 인간의 인간다운 행위가 되는 것이다) 당연히 할 일을 하게 됨으로써 지키는 하나님의 계명[요 13:34]이요 율법[고전 9:21]인 것이다.

다시 말해 영원한 생명의 또 다른 면의 색다른 낙을 느끼고 누리며 살게 되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고난을 통하여 배우는 순종"[히 5:8,9]인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비록 낙이 아닌 낙과는 정반대의 고통이 따르더라도 하나님께 복종하게 되어 있는 것이요 그래서 이 사실을 가리켜 성경은 명시하기를, 주님께서 "아들이시라도 그 받으신 고난으로 말미암아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케 되셨다" 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왕들이요 제사장들이다.

하나님의 상속자들, 그리스도와 함께 된 만유의 주인들이다. 주인답게 격조 높은 품위를 갖춘 말하자면 검증된 자들임을 우리 스스로 입증해야 함은 당연하다. 왕으로서 겁약(怯弱)해서는 안된다, 어떤 경우에서든 스스로의 왕다운 품격, 왕으로서의 품성, 체통에 흠이 있어서는 안된다. 이런 검증을 받는 것은 자주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딱 한번의 삶 뿐이다. 약한 가운데서 강함을 스스로 지키는  것, 역경 가운데서 그런 품성을 검증받는 것인데 주님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선례를 따르는 것이니, 이 세상에서의 한번으로 끝난다.

베드로는 이것을 정금(正金)이 시뻘건 불에 연단되어 나오는 것에 비유했다. 우리 인생사에서도 이런 일은 항다반사로 일어남을 본다. 하물며 하나님의 일에서 이런 일이 없으랴. 하나님이시라도 사람되신 후에는 이런 사람의 과정[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워 온전하게 되는]을 통과하셔만 했던 것이 아니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기개와 왕과 제사장으로서의 금도(襟度)를 네 활개 펴고 마땅히 나타낼 우리이다.

지금까지 요한이 기록한 대로의 베드로와 주님 사이에 오간 문답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을 했지만 정작 핵심은 그런 설명에 있지 않다. 주님의 사랑을 개인적으로 강하게 느끼는 베드로를 "질투"니 하는 따위의 말로 설명하는 것을 아주 유치한 것으로 치부해도 좋다.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그런 여러 가지 상황을 도마에 올려 놓고 요리해본 것은 다음의 가장 핵심적인 것 즉 왜 성령께서 요한으로 하여금 이런 "잣단" 기록을 남겨 놓게 하셨는가 하는 그 근본 핵심 의미이다.

다름 아니라 그리스도 부활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인 것이다. 요한 복음서의 이와 같은 특이한 끝 마무리는 그리스도 부활의 진실성과 확실성을 아주 확정적으로 인(印)쳐 주는 것이다. 왜냐면 이상의 그리스도와 베드로와의 대화가 부활하신 직후의 시점(時點)에서 일어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부활이 만일 지어낸 것이고 꾸며서 만든 것이라면 절대로 이런 대목이 기록될 수가 없다는 이 한 마디 결론으로써 충분한 것이다.

진실 그대로의 가감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이고 요한은 이렇게 기술한 후에도 '필요 없고 객쩍은 사사로운 소리'라고 하여 나중에 삭제하려는 생각은 않고 그대로 둔 것이다. 요한 자기 딴에는 자기에 관한 주님의 언급으로 인해 불필요한 오해가 퍼져 있으므로 이를 바로잡고자 하는 의도였기 때문이다. 만일 거짓말쟁이가 이런 말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거 삼아 지어내려 했다면 왜 이것 하나만 만들어내겠는가. 내친 김에 비슷한 이야기를 더 만들어 냄 직하지 않은가.

요한을 가리켜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는 베드로의 질문 자체가 어찌 보면 싱겁기 짝이 없는 것이다. 또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으로서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 역시 위의 설명과 같이 자세하게 분석해보지 않고 언뜻 들으면 알쏭달쏭하기만 하여 요령 부득이 된다. 최소한 이 요한의 복음서를 읽게 될 수많은 독자 개개인에게는 전연 상관도 유익도 없는 대목임은 분명한 것이다.

요한은 참으로 사사(私私)로운 필요 없는 멋적은 이야기를 중요한 복음서 기록에다 덧붙여 놓은 것인가. 그러나 성령의 감동으로 이렇게 했으니, 우리에게는 당연히 멋적기만 당시의 한 에피소드이지만 그것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 사실이었다는 점에서, 이를 기록하도록 요한을 감동시키신 것은 분명하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대화이었으므로 주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절대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니 이것이 바로 이 대목의 핵심이다. 즉 그리스도 부활의 증명이다.

다시 말해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이와 같은 거짓말을 지어낼 경우 이상과 같은 일견 무의미하기만 한 장면을 지어내야 한다는 고충이 뒤따르는 것이기에, 아무리 천재와 같은 지독한 거짓말쟁이라도 이런 곤욕을 치르면서까지 이야기를 꾸며낼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진실성과 역사성을 후세 사람들에게 확고부동하게 증명하여 각인시켜 주시기 위해, 요한으로 하여금[요한 자신은 자기에 관해 쓸데없이 나도는 낭설을 불식시키려는 단순한 생각이었지만] 이런 무의미한[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시답잖은 내용을 기록해놓게 하신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나눈 베드로의 대화였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후의 다른 모든 기록은 그 부활이 진실이었음을 알리기 위해 기록된 것인 만큼 그런 의도하에서라면 아무 특이한 점이 없으나 이 대목만은 순전히 요한 사도의 개인적인 해명(解明) 차원에서의 사사로운 것이었기 때문에 그런 다른 모든 기록보다 독보적이고 그런 만큼 비중은 크고 엄청난 의미를 가져다 주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무리하기는 하지만' 그 대목이 우리에게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고 "질투 운운" 하면서까지 억지로 해설을 시도해볼 정도였었다.

그리고 또한 부활하신 후의 일에 대해서도 다름 복음서 기자는 아주 간단히 기술해  버리고 있으니, 이는 너무나 명백한 기정 사실이었기 때문에 구태여 여러 가지로 그 부활의 사실을 입증해서 드러내기 위해 이런 저런 말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그 증거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써 모든 답은 이루어져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유독 요한만이 비교적 상세한 내용을 자기가 보고 들은 대로 기록해 두고 있을 뿐이다.

만일 그 때의 그런 '시시껄렁한' 대화가 죽으시기 전의 그리스도와의 대화였다면 그렇게 기록되어 있을 리 만무하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대화이기 때문에 성령의 감동으로 그렇게 기록된 것이다. 이와 같이 아주 시답잖은 것으로써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우리 모두에게 확증해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로서 이 대목을 모든 이들에게 알려 줄 일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만 아니라 "성경의 진실성을 보증하는 성령의 서명 날인"이라 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것도 이제 생각해 보면 바로 이러한 목적으로 이런 효과를 내기 위해 일부러 그런 말씀을 하심으로써 제자들간에 말이 퍼지게 하시고 그 해명 차원에서 요한이 그 복음서 말미에 이런 내용을 갖다 붙이도록 하셨다는 설명도 과히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후대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장 설득력 있게 신빙성 있게 나타내 주는 증거인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각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의 그 정도라면[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각종 서술] 거짓말하는 이들도[성경이 만일 지어낸 것이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조작해낸 것이라 가정한다면] 얼마든지 지어내어 끼워 넣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소한 무의미한 내용을 끼워 넣을 거짓말쟁이는 아담 이래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천하에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니, 그 말씀으로서의 성경[신구약]을 그 어느 인간도 함부로 손대지 못하도록[내용을 가감하거나 가필(加筆)하는 등] 엄정히 간수하실 것은 말하나 마나이다.
  
원래부터 인간은 영생하는 자로서 영생하도록 창조된 것이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와 죽음이 왔다는 것이 그 뜻이다[롬 5:12]. 이 사실을 아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배우는 것이다[요 6:45]. 이렇게 배우지 않고는 그 누구도 그리스도께 올 수 없다. 그러므로 현재는 당연히 '사는 것'이 아니라 '망하는'[눅 13:1-9] 과정에 있는 "죽은 자"[마 8:22]의 몸부림일 뿐이다. 우리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세상에 오셔서 가르치신 그대로, 현재 우리가 산다고 착각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처음부터 영원히 사는 존재로 지으심을 받아 세상에 났기 때문에, 태어나는 인간마다 그런 삶[영원히 사는]의 안목으로 만물 만사를 대하는 데에 비극이 있다. 무슨 말이냐, 오늘 이 시간 어찌 될 줄도 모르고 내일 죽을지 살지도 모르면서 마치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처럼 그런 마음이 되어 그런 자기 분위기에 휩쓸려 일종의 도취 감에서 사는 것이다. 자기만은 마치 안죽을 듯이 모두들 그런 기분에 사로잡혀 지내는 것이다.

그리고 병이나 들고 죽을 사고라도 만나면 "영원히 살게 되어 있는 내가 왜 이렇게 되었나" 하는 듯이 그래서 그 죽음의 위기를 벗어나면 영원히 죽지 않는 양으로 우선 그 위기만을 모면하고자 기를 쓰고 덤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영원히 살기 위해 "회개를 해야"[눅 13:1-9] 하는 것인데, 회개할 생각은 일절 없다. 그렇게 스스로 영원히 살 것처럼 한다고 해서 죽음이 안오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이는 갓나서 죽기도 하고 10, 20, 30대에 짬도 없이 귀천(貴賤)도 없이 정직하게 바로 떠나 버린다.

이런 것이 목불인견(目不忍見, 눈으로 차마 볼 수 없음)의 우리 인생의 참담한 자화상이다. 사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망하는 것임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는 곧 잊어 버린다. 언제 무엇이 일어났느냐는 듯이 태평으로 다시 머리를 싸매고 박이 터져라 초로(草露, 풀잎에 맺힌 이슬)같은 인생 삶, 내일도 기약 못하는 바로 그것을 위해 정신을 팔고 난 다음에 나 역시 그렇게 불시에 불의에 죽음을 만나면, "어이쿠" 하기가 무섭게 사정없이 죽음에게 끌려간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듯이 끌려가는 것이다.

'사는 것'이 아니라 '망하는 것'의 인생 진상(眞相)이다. 이 진실을 놓치지 않고 붙잡는 것이 지혜다. 쉬이 잊어 버리지 않고 항상 마음에 두는 것이 슬기다. 인생이 사는 것은 천국 곧 이 자연계가 아닌 영계(靈界)에서 사는 것이다. 속으면서 살아가는 지금의 모든 인생들이다. 자연계는 자연계에 속한 동식물의 서식처일 따름이다. 만물의 영장(靈長, 영묘 불가사의한 힘을 가진 우두머리)으로서의 인간이 거처할 곳은 영원한 세계 곧 신령한 몸으로서 사는 곳이다.

그러므로 천하 만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은 "회개하라"[행 17:30]는 것이다. 인생으로서의 최대 과제다. 올바르게 사람 사는 도리를 따라 살라는 것이니 그렇게 사는 방법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성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한 지식임을 성경은 똑바로 가르치고 있다[빌 3:8]. 그래서 그 외의 것은 배설물로 여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해가 돋아나고 광명의 세계가 비취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