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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28일 목요일

(2)ㅡ신사임당/신익희/안익태/안중근/안창호/왕건/우장춘/이순신/William Adams














우리나라 거북선을 세계 최초의 철갑선(鐵甲船)의 출현으로 인정,
눈이 휘둥그래졌던 최초의 서양 사람 영국인 선장 William Adams


Robert Lund의 소설 "Daishi San"의 주인공 윌리엄 애덤즈(Wikipedia에도 나오는 영국인 선장). Lund의 소설은 이 영국인 선장의 일기(애덤즈가 임종시에 기록해둔 듯)를 토대로 하여 쓴 것인데 그 일기에 이 사실이 나옴. 그 소설은 인터넷상에서 판매중. 필자도 그 소설을 읽고 그 일기에 거북선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고 흥미를 느껴 그 생애 분석을 해본 것. 

"다이시"는 大師, 즉 큰 스승님이라고 일본인들은 애덤즈를 호칭했던 것. 








나머지는  http://blog.naver.com/trinia/220612016118 에서 연속됩니다

2016년 1월 27일 수요일

해설(解說) 호모리듬 (1)ㅡ김옥균/김유신/김재규/김좌진/김춘추/김활란/대원군/박정희/세조/세종/손병희/손양원


내용이 조잡합니다
단지 참고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해설(解說) 호모리듬" 출간 당시에는 "3운법칙"(trini homo)을 "호모리듬"이라 했습니다. 
이렇게라도 하는 뜻은 3운법칙의 "확실함"(certaintyㅡ눅 1:4)을 알리고자 함이요 3운법칙이 증명하기도 하는 3위1체 원리의 확실함을 알리고자 함이요, 3위1체의 원리를 알림은 만유가 짝(대칭형)으로 되어 있음을 알리고 따라서 초자연계의 실재와 창조주 하나님의 실존과 그 말씀(인간과의 의사 소통)인 성경의 진실성을 확증함이니 곧 모든 사람이 영생의 구원의 기회를 적시에 붙잡으라는 이 세대(this generationㅡ그리스도께서 다시 세상에 오시기 전의 세상) 마지막 경고이므로 이를 전달하기 위함입니다.    


















2016년 1월 25일 월요일

2008년 구글 어스ㅡ거대한 용의 전속력 질주 모습

The Great Dragon Moving
at Full Speed
(Google Earth)

[Rev.12:9]   And the great dragon was cast out, that old serpent(Gen. 3:1-14), called the Devil, and Satan, which deceiveth the whole world: he was cast out into the earth, and his angels were cast out with him.
[Rev.20:2]   And he laid hold on the dragon, that old serpent, which is the Devil, and Satan, and bound him a thousand years


This scene was caught on 20, May in 2008
(continued on http://trinia4.blogspot.com)

거대한 용(龍, dragon)이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모습이 포착되다 



이 사진은 용 곧 사탄이 천사들과의 우주 전쟁에서 대패하여 영원히 지상으로 쫓겨 내려온 날이 되는 1908년 6월 30일 오전 7시 경 바이칼 호수를 지나갔다던 사실을 상기하면서 구글 어스를 통해  바이칼 호수를 찾던 중 발견된 것으로서(2008년 5월 20일) 지금까지 세상에 공개한 적이 없는 세상 그 어디에서도 다시 볼 수 없는 장면. 기회를 보다가 오늘에야 공개하게 되는데 저작권이 구글에게 있어 언제든 계속 게재할 성질의 것은 못되므로 필요하다 생각되시면 컴퓨터에 복사해두시면 될 것이다. 지금 구글 어스에 나오는 대로의 바이칼 호수 위에는 이런 장면이 나타나져 있지 않다. 구글이 새로 촬영하여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용의 실물 사진이 찍히기는 아래 NASA 사진(2001년 8월 촬영)과 더불어 두번 째이다.

우주 공간에 이런 길다란 몸통이 물체가 떠돌아다닐 이유가 없다. UFO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세상에 유포되고 있는 UFO 종류의 영상물은 죄다 악령들의 속임수이므로 악령들의 변장한 모습은 이제 웬만 하면 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악령들을 실질적으로 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변장한 것과 실물과는 차이가 있다. 앞으로 공개하게 될 DPA pix(용이 아닌 기타 악령들의 극히 부분적인 초자연계 신체 또는 육체의 형상)와 마찬가지로  이 사진들은 용의 실물인 것이다. 오직 용만은 DPA pix에 나오는 것과 같은 볼 수 없는 초자연계 육체가 아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즉 가시적인 형상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인간 아담을 죽음에 빠뜨린 대가로 그는 "홁을 먹고 배로 기어다니게" 된 저주 때문이다(창 3:14).

"흙(dust)"이라는 것은 자연계적 성질을 상징한다. 인간의 육체는 "dust"로 창조되었고 초자연계의 에덴에서 창조된 각종 짐승들 즉 영물(靈物)들은 그 곳의 "ground"로 창조된 것이다. 우리말 번역은 똑같이 "흙"으로 되어 있으나 영어(KJV를 중심으로)로는 그렇게 구별하고 있다. 따라서 "흙을 먹는다"는 것은 범죄 결과 자연계에 속래버린 인간과 같은 자연계적 성질을 말함이므로 그렇게 저주 받은 용의 형상은 반드시 인간의 눈에 의이게 되어 있어 때문에 예로부터 용이란 실체가 버젓이 존재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던 그 근거다. 물론 용은 자기를 감추는데 성공하여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다. 즉 그 용은 성경의 용이 아니라 별개의 상상적인 그 무엇이라 인간에 퍼뜨린 대로 이제까지 먹혀들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눈에 띄지 않도록 딴에는 전력을 다하지만 경우에 따라 그 형상이 인간의 눈에 들킬 수도 왕왕 생기기 때문이다.  

성경은 두 번이나(계시록 12:9/20:2) 용이 그 옛적의 에덴낙원의 뱀이라는 것을 "옛 뱀"(that old serpent)이라고까지 명시하였고 그리고 사탄, 마귀라고 밝혀놓았건만 보라, 이 세상 신이 인간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이를 믿지 못하게 하면 그 누구도 철의 장막을 벗어날 수 없으니 지금까지 성경을 믿는다는 이들이 이루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겠지만 지금까지 사탄을 용이라 말하는 이는 거의 없고 오직 난데없이 그룹(cherub) 중 하나라고 믿어온 것을! 사탄의 이 세상 장악력이 이 정도이다(요일 5:19/고후 4:4). 기가 막힐 일이 아닌가. 사탄이 실존과 능력에 대한 이보다 더 명백한 증명, 증거는 없다. 

"그룹"과 "스랍"은 6일 창조 이전의 피조물인 것이다. 사탄은 동물이 아니다. 인간과 똑같다. 능력으로 말하면 초자연적이므로 인간으로서는 가늠도 못한다. 그만큼 우리 인간의 자연계 육체로 전락한(원래의 초자연계 육체로 있다가) 상태가 비참하다는 것을 역으로 증명하는 셈이다. 모든 영물은 인간과 똑같이 직립 보행으로 인간과 하나도 다름이 없다. 오직 인간의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므로 독자적이어서 이런 사람 모습이 아니고 자연계의 동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그 차이뿐이다. 형태면으로는. 그래서 자연계의 뱀과 대칭꼴로서의 용이 그 예이다. 물론 이들 악령들과 대치하고 있는 것이 거룩한 천사들이다. 성경 창세기에서 "용"이라고 하지 않은 것은 자연계와 초자연계가 짝이 되어 밀접하게 하나로 되어 있는데다, 이미 자연계 존재로 전락한 인간 본위로 성경이 기록된다는 그 방침에 철두철미 충실, 일관되도록 함으로써 그 독보적인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팽팽하게 맞서 있는 악령들과 거룩한 천사들과의 대치 상황은 저들끼리의 무슨 헤게모니 쟁탈전이 아니라 오직 처음부터 인간을 중심하는 것이니 왜냐면 인간(아담)이 그들의 애초 수장(首長)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형평을 깨는 것이 각 사람 즉 우리들 본인에게 달린 것이다. 즉 마지막 아담으로 계시는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그 뜻대로 움직이면 막강한 천사들의 비호 아래 들어 악령들이 감히 손도 대지 못한다(요일 5:18). 그러나 오만 방자하여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을 무시할 때 즉각적인 악령들의 철권 통치의 지배 아래에 놓여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부디 명심하실 일이다.   

성경 계시록에는 "붉은 용"으로 되어 있는데 과거 실제 목격한 이들의 증언에는 누르스럼한 색깔로 묘사되고 있으며 실제 중국 등지의 용의 형상에서 황금색으로 그려놓는 것이 대부분이다. 청룡, 적룡, 황룡, 흑룡 등등의 말이 전래되어 오는 것을 보아도 그 색깔 변하기는 식은 죽 먹기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붉은 용"이라고 할 때는 의미가 다르니 그 본래의 고유 빛깔이든가 아니면 마지막 때 딴에는 절망에 가까운 흥분 상태에서의 변형이라 할까ㅡ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알 바 아니다. 

아래 NASA 사진은 고공에서 인간이 눈에는 절대 띄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태평으로 유유히 떠다니는 것이 불의의 위성 카메라 렌즈에 잡혀버린 꼴이다. 그가 신(神)이지만 우리 자연계 육체의 인간에게 신일 뿐이지 일개 피조물인 것이니, 위성 카메라가 작동 중인 것을 알 리는 만무하다. DPA pix도 그런 방심 중에 있다가 그 영상이 드러난 결과다. 그 능력으로야 얼마든지 촬영물을 없앨 수 있지만, 그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거룩한 천사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 다음에야, 그들이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음을 그들 스스로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자기네 실수로 이런 촬영물이 생겨지게 되고 유포되는 것을 당연히 원하지는 않으나(그 증거로 요즈음은 그들의 발자국을 다시는 볼 수 없으니 의도적으로 그런 발자국을 남긴 것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그들의 형적이 새겨진 동영상이나 사진을 마음대로 없앨 수 있는 권한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천사(들)가 인도하여 그런 영상물이 생겨난 것이라면 당연히 그들은 손도 대지 못한다. 그들의 실수는 실수대로 남겨져야 하는 것.    

이 사진과 관련 자세한 것에 대해서는 http://trinia4.blogspot.com 각 페이지에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2016년 1월 24일 일요일

인생 항해의 폴라리스(영원한 북극성)

3운법칙이나 3위1체 원리보다 더 근본적 주제는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생명의 법칙

3운법칙이니 3위1체의 원리니 하는 것은 오직 이에 대한 방향을 잡아주는 
인생 항해자(航海者)에게 지대한 역할을 하는 

북극성(polaris)의 위치일 뿐
 원양 선박의 선장은 북극성으로 정확한 방향을 잡는다고 한다



"다른 일에 힘을 쏟았다"는 것은, 현재의 기독교 교리가 너무나 성경과는 판이하여 성경에서 일탈해 있으므로 이에 대한 정리 작업에 시간을 바쳤기 때문인데 지금은 때가 되었으므로 모든 것을 한꺼번에 쏟아놓는 셈이다. 천 수백년 간의 "전통적인 교리"로 고착화되어 온 잘못된 성경 해석을 타파하기 위한 일대 공사로서는 거의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도 지나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위인이 워낙 게으르고 보통에서도 최하위에 항상 머문다는 사실을 본인 스스로가 잘 아는지라 진작 발표하지 못했음을 항상 부끄러하는 생각뿐이다.   

전반적으로(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극소수이기는 하나 있기는 있으므로) 지금까지의 기독교 교리가 성경과 다르다는 것은 간단히 세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첫째는, 로마서 7장에서 "육신이 죄 가운데로 나를 사로잡아 온다"는 바울 사도의 설명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 해방"(롬 8:2) 이전에 죄의 육신에 매여 있으니까, "생명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계명"(롬 7:10)으로서 "거룩하며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고 신령한"(롬 7:12,14) 그 율법과 계명"(롬 7:14)이 "육신에 속해 죄 아래 팔려 있는 인간에게는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롬 7:14)이 되고 죄인으로서의 실상을 알게 함이었으니, 왜냐면 나라에 법이 없으면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아 처벌될 수 없으나 법이 생겼을 때는 그 법대로 하지 않을 경우 처벌되는 것과 같음을 상세히 밝힌 것에 불과한 것이다. 고로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함께 죽음으로 함께 장사지낸(무덤에 묻혀버린) 사실을 세상 앞에 공표하는 뜻으로 회개의 세례를 받듯이(골 2:12), 우리의 죄의 몸이 그리스도를 믿어 그 안에 있으면 죽어 멸해진 것이다(롬 6:6,4). 그런데도 왕청스럽게 인위적인 교리를 만들어내어 바울 사도 자신의 믿은 후의 체험을 기록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오늘날까지의 기독교다. 

따라서 죄를 어느 정도 지어도("지을 수밖에 없어도"가 더 정확한 표현일 터) 구원은 받는다는 이상한 결론으로 유도되어, 성경에 "항상 복종하여(하나님의 말씀에)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한 엄중한 경고를 완전히 무시하고 들어가게 된다. 죄를 지어도 의인으로 정하시니까 구원을 이루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해석일 수밖에 없게 된다. "두렵고 떨림으로"까지 심각한 경고인데도 이를 무시하면 그 결과야 뻔하지 않은가. 마땅히 경고할 자리에서 경고하지 않는 경우 간접 살인 행위, 살인 방조 행위라 해도 무방하다. 즉 살인자의 반열에 들어서 있는 것이 오늘날까지의 일반적인 기독교 교리다. 이것이 둘째다. 

고로 결과론적으로 셋째, 구원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비로소 알아 그 사랑에 감동되어 사랑의 순종을 함으로써 영생에 이르는 것인데도, 처음부터 창조주의 임의 결정으로 구원받도록 조정되었기 때문에(그들은 성경의 "미리 택하심"을 이런 식으로 곡해한다) 믿게도 되고 영생한다고도 가르치게 된다. 앞에서 말한 "항상 복종하라"(빌 2:12)는 경고는 앞서 설명한 사랑의 순종을 힘쓰라는 뜻인데 이를 완전히 무시하니 필연적으로 이런 인위적인 교리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이로써 세상에서도 지탄 받는 이기적인 각종 사이비, 이단이 발호하는 온상이 되어 온 것이다(그렇지 않아도 이단이 생기게 되어 있는 판인데ㅡ악령이 이 세상 신이 되어 있음을 인해). 

고로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만 사는 결초보은의 순종으로 말미암는 사랑의 순종을 힘쓰라는 뜻으로서, 나 자신의 구원을 또(이미 은혜로 구원을 받았음에도) 이룬다는 뜻이 아니니, 원래부터 삶이란 것이(인간에게나 천사와 같은 초자연계 존재에게나) 나를 위함이 아닌 나의 상대를 위해 사는 즉 한 몸 체제에서 머리는 몸을 몸은 머리를 위함으로써 눈, 코, 팔, 다리 등 각 지체된 자기 임무와 역할을 다함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눈이 아무리 자기를 위해 살아보아야 살아지지 않는다. 팔, 다리 기타 다른 지체를 위해 눈 역할을 해야 자기 역시 위해지는 그런 구조다. 이것이 삶의 법칙이다. 

따라서 그 삶의 법칙 즉 나를 사랑하는 머리의 뜻대로 순종을 잘 하여 그 지시대로 다른 지체된 이들 즉 내 이웃 곧 '사람 사랑'을 강조하는 것이 "구원을 이루라"는 의미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죽은 목숨을 살려주셨으니 "열심히 살라"는 그 뜻이다. 앞의 설명대로 이웃을 위하지 않고, 이타주의가 아니고 이기주의 즉 자아중심으로 흐르면 그 때에는 생명의 법칙을 어긴 결과로 생명으로부터 이탈, 분리되는 판이니 어찌 두려워하고 떨 일이 아닌가. 왜 두려워하고 떨 충분한 이유가 되느냐 하면 그런 선례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을 현재의 이 모양 요꼴의 자연계 죽음의 육체가 되게 한 장본인인 첫 사람 아담이 그렇고, 그를 그렇게 만든 장본인 악마 사탄을 위시한 여러 악령들의 영원한 멸망에 빠져 있는 운명이 바로 그 때문에 일어난 결과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사는 법(칙)을 따라 "열심히 살지" 못함으로 인한 자기 파멸인 것이다.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부여하신 하나님의 뜻에도 위의 "인간 구원이 미리 정해졌다"는 교리는 모순이다. 진리에는 모순이 발 붙일 틈이 없다. 미리 택하심(predestination)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의 영역(foreknowledge)이다. 무엇을 미리 아시느냐, 우리가 우리 자유 의지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순종할 것을 미리 아시기 때문에 그 순종의 결과에 차질이 없도록 미리 장애를 제거하신다는 의미다. 당연하지 않은가. 온통 자유 의지로 움직이는 세계인데 그 무엇이 장애가 되어 나의 사랑의 순종이 제대로 결실을 맺지 못하게 해어야 되겠는가. 그런 일은 하나님의 머리로서의 직권으로써 의당히 막아주셔야 하는 것이니 바로 이를 가리켜 미리 택하심이라 하는 것인데 일개인 몇몇의 제멋대로의 해석을 지금까지 마치 하나님의 말씀처럼 위해 온 것이다. 모두 이 세상 신(神)의 장난질인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팽배해 있는 사조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다"이다. 우리말 성경은 버젓이 그렇게 번역되어 있으니 번역자가 그런 당치도 않은 신학 사조에 물들어 편견과 선입견으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영역 "for"는 반드시 대신이 아니다. 무난하게 그저 "위하여"이다. 그렇다고 영어권에서는 이 "대신"이라고 믿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쪽 "신학"에서 묻어 들어온 "신학" 사조인 것이다. 성경은 "대신 죽으심"이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 "대신"이 아니라 "함께"(엡 2:5/골 2:13)이다. "대신"이라 속고 있기 때문에 "적당히 어쩌다 죄를 지어도 이미 나는 구원되었으므로 일 없어" 하는 태평 심사(心思)가 된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룬다"는 것과는 정반대 개념이다. "대신"과 "함께"가 또한 그렇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한 몸 관계에서의 사랑이 구원의 요체다. 하나님의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나에게 대한 사랑이 모든 것의 시발점, 도화선이 된다. 하나님이 나를 자신을 바치시기까지 사랑하셨다는 이 사실에 있는 것이니 이것 하나만 확신해도 그 후는 당연히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 할 것이니 즉 순종할 것이므로 이것이 구원받음의 증거다. 따라서 교회에서는 설혹 그렇게 성경에 위반되게 가르쳤다 하더라도 자기 양심의 명령에 따라 그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에게는 구원받음에 아무 하자가 없었음에 유의할 일이다(고전 8:3).  오직 그런 교리를 핑계대고 빙자하여 자아중심으로 사는 빌미를 스스로 만들었을 때 자멸의 함정이 되어 왔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 현상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 그것은 아니니, 왜냐면 이런 모순에 가득 찬 인위적인 교리는 일반 세상 사람들의 인식에도 부합하지 않을 것은 당연하여 성경을 이상한 논리의 괴상망측한 것으로 치부해버려 구원의 길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마저 부정하게 만든 것이다(롬 2:24) 그런 논리에도 맞지 않는 성경의 하나님을 누가 신뢰하고 공경할 것인가. 무턱대고 영생에만 욕심이 있는 이들이 구원과 영생이 "공짜"라고 가르치니까 거기 혹해 달려들지는 몰라도. 놀고 먹는 그런 공짜는 세상에 없다. 자기를 위함으로써 멸망에 이르는 결과를 맺든 아니면 이웃을 위해 열심히 살든, 어디에든 열심을 내게 되어 있는 것이 인생이다. 성경은 이웃을 위하는 선과 의로운 일을 독려하는 것이다. 자아중심 곧 자기의 유익을 위하는 일에 경고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의 구원을 이루라"고 끊임없이 경고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얻음도 "선한 일을 하기 위해"(엡 2:10/요 5:29) 새로 창조됨을 말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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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장절을 꼬박꼬박 첨부하는 이유는 개인의 소견이 아니라 성경의 권위에 의한 것이라는 근거를 삼음이며 성경을 아는 이들로 하여금 과연 그러한가 하여 직접 확인해볼 수 있도록 하는(행 17:11) 차원인 것.

2016년 1월 22일 금요일

"생불(生佛)"이라고 하는 달라이 라마의 미리 보는 생애 조감도

 "생불(生佛)"이라고 하는 달라이 라마의 미리 보는 생애 조감도
그는 FS형으로 우리 나이 90세로 생을 끝낸다. 





그는 지금 팔순을 넘겨 그의 연보 또한 단순하기 때문에 이런 다이어그램 작성이 가능하다.

필자는 그 앞서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지만...

그의 생애에 대한 것은 인터넷으로 나오는 자료로써도 충분히 살펴볼 수 있다.

필자의 소견으로는(생애 분석 경험이 극히 짧기는 하나) 인생이 5,60대에 접어들면 그 생애의 전체 다이어그램을 스스로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판단된다. 대략 그 윤곽은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유명 인물에 대해서는 신문지상에 올려져 있는 그의 연보(年譜)만 보고도 충분히 그 생애를 도식화할 수 있다. 여러 인물의 생애를 이와 같이 분석해보면 흥미진진하다기에 앞서,

"아아, 이런 것이 인생이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새어 나오게 될 것이다. 인생관, 세계관, 우주관이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필자의 경험으로 단언할 수 있는 것으로서 각 생애 끼리끼리 유사하게 공통점을 갖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3종류의 유형에 제한 받지 않는 공통점이다. 즉 3유형(FS, OT, SN)으로 한정되되 이런 생애 내용별로 분류 가능한 <내용별 분류>다.  예컨대, 이효봉 선사와 스웨덴 오페라 여가수 Jenny Lind, 미국 대통령 트루만과 남미의 영웅 산 마아틴이 그렇다. 이쯤 되면 "인간학(人間學)"이라는 새 영역이 탄생할 만도 하다. 이 분야는 "homotrinics"라 명명해도 좋겠다. 셈법이 극히 간단하여 초등학생 저학년 산술 수준이므로 어린 아이들이라도 손댈 수 있는 분야다.


생애 분석시에는 사주팔개자 풀이나 점성술 따위로 인식하여 접근하면 번지 수부터 틀린 곳에서 집을 찾는 격이 된다. 다시 예를 들지만, 이 효봉 선사의 생애를 분석할 때에는 그가 화려한 판사직에 있던 기간이 단연 배제된다. 또 Jenny Lind의 경우 그가 화려한 오페라 무대에 데뷔한 때와 그 명성을 세계적으로 드높이던 기간은 그의 LP(활동기, 전성기)에 전혀 합산되지 않는다. 오히려 DP(그 반대 현상의 기간)에 해당된다. 같은 독립운동을 해도 간디는 그 투옥된 햇수가 모두 LP에 포함되나, 네루는 그 기간을 헛되이 날려보낸 손해 보는 햇수로 여긴 그대로 그의 트리니 호모(TRINI HOMO, 3운법칙)는 계산되어져 나온다. 즉 간디는 그런 투옥 기간을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믿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각 인간의 생애에서 3운법칙은 그 '인간됨'을 그려내는 것이다. 해당 인간의 총합(總合)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트리니 호모에 관해 대충 설명해놓은 전체 내용을 찬찬히 훑어 보신 다음에(네이버 블로그에서 시리즈 (1)~(35) "보어와의 논쟁에서 아인슈타인이 틀렸다"  http://blog.naver.com/trinia) 분석에 착수하셔야 무리가 없다. 




다음부터는 1993년 간행 책자 "해설(解說) 호모리듬"을 그대로 여기에 옮겨놓을 예정이고, 다음 블로그에도 동시에 올려 전자책(다음 블로그 북)으로 엮을 생각이다. 


1972년에 3운법칙에 대한 단서를 잡고 그 후 지금까지 거의 반세기가 흘러갔으나  그 기나긴 세월에 역대 인물들의 생애 분석 자료만 해도 수천 권을 헤아릴 정도로 쌓아놓았을 법도 하지만, 굳이 이에 대한 증거를 더 찾을 필요가 없고 또 인간의 생애 분석을 하나의 도락(道樂)처럼 여길 것은 아니기에 그런 일에 집증하지 않았고 다른 일에 힘을 쏟느라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다만 독자들 스스로 직접 분석하면 될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인데, 지금도 같은 생각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분석해 놓으신 것이 있을 경우 보내주시면 분석자의 인적 사항을 밝혀(원하시지 않으면 물론 그 부분은 생략하겠으나) 여기 게시할 생각이다. 분석상의 문제점도 함께 제시해주신다면 다른 분들에게 참고가 될 것이다.

"다른 일에 힘을 쏟았다"는 것은, 현재의 기독교 교리가 너무나 성경과는 판이하여 성경에서 일탈해 있으므로 이에 대한 정리 작업에 시간을 바쳤기 때문인데 지금은 때가 되었으므로 모든 것을 한꺼번에 쏟아놓는 셈이다. 천 수백년 간의 "전통적인 교리"로 고착화되어 온 잘못된 성경 해석을 타파하기 위한 일대 공사로서는 거의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도 지나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위인이 워낙 게으르고 보통에서도 최하위에 항상 머문다는 사실을 본인 스스로가 잘 아는지라 진작 발표하지 못했음을 항상 부끄러하는 생각뿐이다.   

전반적으로(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극소수이기는 하나 있기는 있으므로) 지금까지의 기독교 교리가 성경과 다르다는 것은 간단히 세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첫째는, 로마서 7장에서 "육신이 죄 가운데로 나를 사로잡아 온다"는 바울 사도의 설명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 해방"(롬 8:2) 이전에 죄의 육신에 매여 있으니까, "생명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계명"(롬 7:10)으로서 "거룩하며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고 신령한"(롬 7:12,14) 그 율법과 계명"(롬 7:14)이 "육신에 속해 죄 아래 팔려 있는 인간에게는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롬 7:14)이 되고 죄인으로서의 실상을 알게 함이었으니, 왜냐면 나라에 법이 없으면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아 처벌될 수 없으나 법이 생겼을 때는 그 법대로 하지 않을 경우 처벌되는 것과 같음을 상세히 밝힌 것에 불과한 것이다. 고로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함께 죽음으로 함께 장사지낸(무덤에 묻혀버린) 사실을 세상 앞에 공표하는 뜻으로 회개의 세례를 받듯이(골 2:12), 우리의 죄의 몸이 그리스도를 믿어 그 안에 있으면 죽어 멸해진 것이다(롬 6:6,4). 그런데도 왕청스럽게 인위적인 교리를 만들어내어 바울 사도 자신의 믿은 후의 체험을 기록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오늘날까지의 기독교다. 

따라서 죄를 어느 정도 지어도("지을 수밖에 없어도"가 더 정확한 표현일 터) 구원은 받는다는 이상한 결론으로 유도되어, 성경에 "항상 복종하여(하나님의 말씀에)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한 엄중한 경고를 완전히 무시하고 들어가게 된다. 죄를 지어도 의인으로 정하시니까 구원을 이루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해석일 수밖에 없게 된다. "두렵고 떨림으로"까지 심각한 경고인데도 이를 무시하면 그 결과야 뻔하지 않은가. 마땅히 경고할 자리에서 경고하지 않는 경우 간접 살인 행위, 살인 방조 행위라 해도 무방하다. 즉 살인자의 반열에 들어서 있는 것이 오늘날까지의 일반적인 기독교 교리다. 이것이 둘째다. 

고로 결과론적으로 셋째, 구원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비로소 알아 그 사랑에 감동되어 사랑의 순종을 함으로써 영생에 이르는 것인데도, 처음부터 창조주의 임의 결정으로 구원받도록 조정되었기 때문에(그들은 성경의 "미리 택하심"을 이런 식으로 곡해한다) 믿게도 되고 영생한다고도 가르치게 된다. 앞에서 말한 "항상 복종하라"(빌 2:12)는 경고는 앞서 설명한 사랑의 순종을 힘쓰라는 뜻인데 이를 완전히 무시하니 필연적으로 이런 인위적인 교리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이로써 세상에서도 지탄 받는 이기적인 각종 사이비, 이단이 발호하는 온상이 되어 온 것이다(그렇지 않아도 이단이 생기게 되어 있는 판인데ㅡ악령이 이 세상 신이 되어 있음을 인해). 

고로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만 사는 결초보은의 순종으로 말미암는 사랑의 순종을 힘쓰라는 뜻으로서, 나 자신의 구원을 또(이미 은혜로 구원을 받았음에도) 이룬다는 뜻이 아니니, 원래부터 삶이란 것이(인간에게나 천사와 같은 초자연계 존재에게나) 나를 위함이 아닌 나의 상대를 위해 사는 즉 한 몸 체제에서 머리는 몸을 몸은 머리를 위함으로써 눈, 코, 팔, 다리 등 각 지체된 자기 임무와 역할을 다함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눈이 아무리 자기를 위해 살아보아야 살아지지 않는다. 팔, 다리 기타 다른 지체를 위해 눈 역할을 해야 자기 역시 위해지는 그런 구조다. 이것이 삶의 법칙이다. 

따라서 그 삶의 법칙 즉 나를 사랑하는 머리의 뜻대로 순종을 잘 하여 그 지시대로 다른 지체된 이들 즉 내 이웃 곧 '사람 사랑'을 강조하는 것이 "구원을 이루라"는 의미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죽은 목숨을 살려주셨으니 "열심히 살라"는 그 뜻이다. 앞의 설명대로 이웃을 위하지 않고, 이타주의가 아니고 이기주의 즉 자아중심으로 흐르면 그 때에는 생명의 법칙을 어긴 결과로 생명으로부터 이탈, 분리되는 판이니 어찌 두려워하고 떨 일이 아닌가. 왜 두려워하고 떨 충분한 이유가 되느냐 하면 그런 선례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을 현재의 이 모양 요꼴의 자연계 죽음의 육체가 되게 한 장본인인 첫 사람 아담이 그렇고, 그를 그렇게 만든 장본인 악마 사탄을 위시한 여러 악령들의 영원한 멸망에 빠져 있는 운명이 바로 그 때문에 일어난 결과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사는 법(칙)을 따라 "열심히 살지" 못함으로 인한 자기 파멸인 것이다.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부여하신 하나님의 뜻에도 위의 "인간 구원이 미리 정해졌다"는 교리는 모순이다. 진리에는 모순이 발 붙일 틈이 없다. 미리 택하심(predestination)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의 영역(foreknowledge)이다. 무엇을 미리 아시느냐, 우리가 우리 자유 의지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순종할 것을 미리 아시기 때문에 그 순종의 결과에 차질이 없도록 미리 장애를 제거하신다는 의미다. 당연하지 않은가. 온통 자유 의지로 움직이는 세계인데 그 무엇이 장애가 되어 나의 사랑의 순종이 제대로 결실을 맺지 못하게 해어야 되겠는가. 그런 일은 하나님의 머리로서의 직권으로써 의당히 막아주셔야 하는 것이니 바로 이를 가리켜 미리 택하심이라 하는 것인데 일개인 몇몇의 제멋대로의 해석을 지금까지 마치 하나님의 말씀처럼 위해 온 것이다. 모두 이 세상 신(神)의 장난질인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팽배해 있는 사조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다"이다. 우리말 성경은 버젓이 그렇게 번역되어 있으니 번역자가 그런 당치도 않은 신학 사조에 물들어 편견과 선입견으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영역 "for"는 반드시 대신이 아니다. 무난하게 그저 "위하여"이다. 그렇다고 영어권에서는 이 "대신"이라고 믿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쪽 "신학"에서 묻어 들어온 "신학" 사조인 것이다. 성경은 "대신 죽으심"이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 "대신"이 아니라 "함께"(엡 2:5/골 2:13)이다. "대신"이라 속고 있기 때문에 "적당히 어쩌다 죄를 지어도 이미 나는 구원되었으므로 일 없어" 하는 태평 심사(心思)가 된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룬다"는 것과는 정반대 개념이다. "대신"과 "함께"가 또한 그렇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한 몸 관계에서의 사랑이 구원의 요체다. 하나님의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나에게 대한 사랑이 모든 것의 시발점, 도화선이 된다. 하나님이 나를 자신을 바치시기까지 사랑하셨다는 이 사실에 있는 것이니 이것 하나만 확신해도 그 후는 당연히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 할 것이니 즉 순종할 것이므로 이것이 구원받음의 증거다. 따라서 교회에서는 설혹 그렇게 성경에 위반되게 가르쳤다 하더라도 자기 양심의 명령에 따라 그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에게는 구원받음에 아무 하자가 없었음에 유의할 일이다(고전 8:3).  오직 그런 교리를 핑계대고 빙자하여 자아중심으로 사는 빌미를 스스로 만들었을 때 자멸의 함정이 되어 왔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 현상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 그것은 아니니, 왜냐면 이런 모순에 가득 찬 인위적인 교리는 일반 세상 사람들의 인식에도 부합하지 않을 것은 당연하여 성경을 이상한 논리의 괴상망측한 것으로 치부해버려 구원의 길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마저 부정하게 만든 것이다(롬 2:24) 그런 논리에도 맞지 않는 성경의 하나님을 누가 신뢰하고 공경할 것인가. 무턱대고 영생에만 욕심이 있는 이들이 구원과 영생이 "공짜"라고 가르치니까 거기 혹해 달려들지는 몰라도. 놀고 먹는 그런 공짜는 세상에 없다. 자기를 위함으로써 멸망에 이르는 결과를 맺든 아니면 이웃을 위해 열심히 살든, 어디에든 열심을 내게 되어 있는 것이 인생이다. 성경은 이웃을 위하는 선과 의로운 일을 독려하는 것이다. 자아중심 곧 자기의 유익을 위하는 일에 경고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의 구원을 이루라"고 끊임없이 경고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얻음도 "선한 일을 하기 위해"(엡 2:10/요 5:29) 새로 창조됨을 말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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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장절을 꼬박꼬박 첨부하는 이유는 개인의 소견이 아니라 성경의 권위에 의한 것이라는 근거를 삼음이며 성경을 아는 이들로 하여금 과연 그러한가 하여 직접 확인해볼 수 있도록 하는(행 17:11) 배려 차원인 것.


"지렁이(worm)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다.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다"(사 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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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19일 화요일

꿈을 꾸는 듯 무엇에 단단히 취하거나 홀린 듯한 무서운 현실


아메바로부터 고등 생물로 거기서부터 영장류 같은 원숭이로 그 원숭이가 다시 사람으로 진보 발달해왔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이 진화론인 바, 그렇게 진화(進化)하자면 장구한 세월에 걸쳐 후대를 낳고 낳아 대를 이어감으로써 시간을 벌어야 하는데, 그렇게 종족이 유지 보전되기 위해서는 처음 시초부터 암,수라는 두 개체가 동시에 생성되어야 하므로, 이 암수컷의 동시 생성이라는 것은 그런 종족 보전을 처음부터 목표하여 사전 기획, 고안, 설계를 따라 결과물인즉 이미 창조 행위를 시인하고 들어가는 것이므로, 창조가 아니라 진화에 의해 오늘날 인간을 비롯한 생물이 지상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은 소가 웃을 일이지 지성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 감히 할 수 없는 참으로 신기한 발상인 것입니다. 하고많은 생물의 암수가 모두가 다 동시에 생겨나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다지도 바보 같은가 하고 의아해질 정도입니다. 더군다나 이런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온 세계 과학자들에 의해 절대 진리로 신앙되어져 왔다는 점에서 그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다시 말해 모든 세상 사람이 "과학적 사실"이라고 딱지만 붙여놓기만 하면 무조건 절대적 진리로 맹신해 왔기 때문입니다. 방금 말한 이러한 결론은 3위1체 논리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닙니다. 

3위1체의 원리는 단지 둘이 동시에 생겨나되 그 둘 중 하나에서 다른 하나가 나왔다는 사실만 확증적으로 밝히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애초 그 하나로만 있던 상태가 둘로 나누어져 있어도 그 처음의 하나로 있던 모습을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특성이 있다는 것만 말합니다.  인간이 최우선적으로 호소하게 되어 있는 것이 '상식'입니다. 순수한 상식 차원에서 하는 말입니다. 이런 상식을 외면한 허망한 주장을 "과학"으로만 포장시켜 놓으면 모두가 다 기가 죽어 당장 죽는 시늉이라도 하니 이것이야말로 허망한 일이 아닙니까. 허수아비, 꼭두각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150년간이나 이런 지극히 상식적인 말을 하는 이도 없었고 생각하는 이도 없었다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바로 이것이, 이 세상 신(神)이 있다는 증거요, 그의 한 마디 말 또는 의도라면 인간을 완전히 허수아비로 만들어 얼마든지 농락할 수 있다는 확증을 우리가 잡은 것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무서운 일이 아닙니까. 이것을 의당히 오늘날의 화두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생물의 환경 적응은 단지 "환경 적응"일 뿐이지 그것을 "진화"라고 부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과학을 신격화하지 말라는 엄중 경고가 바로 이 진화론입니다. 우리는 이 "진화론"으로써 단단한 학습 효과를 거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전혀 상식에도 논리에도 맞지 않는 진화론을 150년간이나 절대 진리처럼 추종해 온 학습 효과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아무리 "과학"이라는 너울을 쓰고 무엇이 또 다시 나타나더라도 그것이 상식에 어긋날 때에는 단연 배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것은 반드시 이 세상 신에게서 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신이라는 <태풍>의 위력 앞에서 완전히 무기력한 것이 "인간이라는 <초목(草木)>"임을 자각하라는 것이 이 진화론을 통해 내리시는 엄중 경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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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모든 알림 마당을 개설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출생하여 새로 창조됨으로써 영생할 수 있도록 하는 일에 길잡이가 되려는 오직 하나의 목적밖에 없습니다. 온 세계인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언어 장벽을 극복하는 것이 시급하니 영어에 능통하신 분은 자원 봉사로(지금 능력으로는 사례비를 드릴 수 없어) 적극 협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방면에서만 아니라 기타 여러 모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도움의 손길을 뻗쳐주셔서 사람을 갱생시키는 좋은 일에 함께 힘을 보태십시다. 이 목적을 위해 www.hahahehehihihohohuhu.com 을 설치했습니다. 사이버 주소가 기억되기 쉽도록 영어 모음 aeiou에 웃는 소리가 나는 h를 덧붙이는 별난 방법을 택했습니다. "바르게 영원히 사는 회개 운동(바영사운)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렇게 믿음의 동지들이 모이면 그것이 소박(素朴)한 교회 활동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이면 내가 거기 있다" 약속하셨고 "두 사람 이상이 합심하여 기도하여 구하면 내가 응답하겠다"고 또한 약속하셨습니다. 때가 촉박하고 여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우리로서(고후 6:1) 힘을 결집하십시다.    


2016년 1월 16일 토요일

방향 감각을 잃은 개화(開花)



2016년 1월 9일 오후 2시 40분





자연계만 왕창 버려놓아 자연계 생물에게 몹쓸 짓만 하고 자신은 자승자박한 꼴이 된 인간 군상
자기 고향(초자연계 육체)으로 복귀, 환원하면 되는 간단한 일을 가지고...



한겨울에 <꽃>이 피어 났으니 봄의 전령사가 아니라 문명을 빙자한 인간의 자연 파괴에 신음하며 용틀임치는 지구에 장단 맞추기인가. 자연계 존재로 전락한 인간에 의해 순수한 자연의 아름다움이 파괴되고 있는 여파이다. 초자연계 육체로 변환하는 것만이 해결책이지 이런 자연계 환경에서 초자연계 삶을 동경하니 그런 억지가 없다. 문명 발달이란 거창한 이름을 지어 붙이지만, 자신이 몸 두고 있는 자연계만 결딴 내고 있는 모순만 잔뜩 안고 있는 인생, 비극의 주인공.

사진 촬영은 부산 남쪽 바다 가까운 양산 가산 수변 공원. 1년 전 DPA pix를 촬영했던 현장이다. 촬영했다기보다 촬영된 것이다. 의도적으로 찍은 것은 없으니까. 발자국 외에는. 즐비하게 널려져 있는 "발자국"만은, 발자국이 남겨져 있으니까 찍은 것이고, 그 외에는 모두 카메라 렌즈에 포착되어 있으니까 찍힌 줄을 안 것뿐이다.


무슨 기대를 하고 간 것은 아니지만 발자국이라도 있으면 하고 갔던 것인데, 그러나 "발자국"은 찾아볼 수 없었다. 1년 전에 찍힌 발자국도 의도적으로 발자국을 남긴 것이 아님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눈이 올 때이면 눈 위에도 그런 발자국을 총종 박아놓는 것을 보면 그들 나름대로 부드러운 흙이나 눈 위를 걷는 것을 어느 정도 즐기는 모양. 그렇지 않고서야 자기 정체가 폭로될 수 있는 부담을 안고 그렇게 발자국을 남길 리 없다.


DPA pix는 조만간 공개할 예정이다. 인류사상 영물(靈物, 이 경우 악령)이 사진에 포착된 예는 일찍이 없다. 사진술이 발명된 지도 오래지는 않지만. 오직 예외가 있으니 NASA의 용(龍)의 모습의 촬영. 우연히 얻은 수확. 그 외에는 악령들이 UFO, 기타로 가장해서 찍힌 것은 무수히 많지만 직접 그 모습(극히 부분적이기는 하나)이 찍힌 예는 없다. NASA에 의해(http://blog.daum.net/trinia/16)
 용의 모습이 찍힌 후에는 악령들은 이에 대한 물타기 작전을 시도해 그렇게 촬영된 후로는 여러 가지 뱀 또는 용의 형태로 가장해 공중에서 쇼를 부리는 일이 부쩍 늘어났음을 youtube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용은 보통 다른 악령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차원이 다르다는 말은 유일하게 인간의 눈에 띄게 되어 있는 영물이라는 말이니, 아담 부부를 죽음에 몰아넣은 대가로 저주 받아 "흙을 먹음"으로써 된 결과다. 때문에 인간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려야 하는 판이라 그의 고충도 실상 이만저만이 아니다. 왜냐면 인간의 눈에 띔으로 자신에게 유익한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그는 "에덴동산의 그 뱀"이었다는 사실을 은폐하는데 아주 성공적이었던 사실에서도 이는 확인된다. 지금까지도 성경을 믿는다는 기독교계에서 이 악령을 그룹(cherub) 중의 하나로만 인정해왔지 에덴 낙원의 "그 뱀"이라고 인식하지 않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 

성경에 "그 뱀"이라는 뜻으로 "옛 뱀"이라고 두 번씩이나 밝히고 있지만(계 12:9/20:2ㅡ"용...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 사람(기독교인)들이 성경 기록을 무시하기가 이 정도이다. 하물며 성경을 믿지 않는 이들이야 말해서 무엇하랴. 자연계에서는 뱀이지만 초자연계이므로 "용(dragon)"이다. 저주 받아 "배로 기어다니니까" NASA 카메라에 찍힌 것도 영낙없는 뱀의 형상이다. 애초에는 모든 영물이 그러하듯 직립보행인 것이다. 형상은 자연계의 동물들의 모습이나(그 대칭 꼴이므로) 초자연계 존재이므로 그 모습은 아름답다. 하나님의 창조물 중에 조화와 균형을 잃은 보기 흉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사람들이 아는 대로의 소위 악마의 형상은 악령들이 그들의 정체를 감추기 위한 일환으로 스스로를 그런 흉한 것으로 변장하여 인간들에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악령이라는 것이 별도로 처음부터 존재하는 양으로ㅡ. 

"큰 용"이라 했듯이 용의 몸집이 어마어마하게 큰 것은 저주 받아 배로 다니고 전속력으로 다녀야 함으로써 빚어진 부수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병적인 것이다. 인간을 속여 이러한 비참한 상태로 전락시킨 장본인으로서 그리고 인간 역시 이로 말미암아 저주 받아 있는 상태인데(아담 부부의 잘못, 죄과도 상당하므로), 그 정도 수준의 저주는 당연한 것이다. 그가 자기 모습을 감추려고 하는 것은, 그런 용이 에덴낙원의 그 영물이라는 것을 실물로 보고 사람들이 확인하는 경우 온 세상이 구원 받기 위해 큰 소동을 일으킬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 실상이 알려진다고 해서 그리 큰 손해라고 판단하지 않는 것은, 그 자신 창조자 하나님으로 가장하여 아주 그럴듯하게 속일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남아 있음을 잘 알기 때문. 그 때에는 자기를 사탄이라고 올바르게 지적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사탄의 패거리로 몰아 뒤집어씌워 처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때만 기다리고 있고 그 때는 목첩에 와 있음을 우리 또한 알고 있다. 

인간의 모습은 성경에서 밝히는 대로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양"이다. 유일한 것이므로 다른 피조물 즉 영물의 모습들이 사람의 형상일 수는 없다. 단지 사람에게 나타날 때에만 인간의 형상으로 자신을 변형시킬 수 있다. 초능력자들이므로 자신을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고(그래서 오늘날은 소위 "UFO"로도) 심지어 인간 여자와 관계할 정도로(악령들의 경우) 완벽하게 변신할 수 있어 "네피림"(창 6:4)이라는 자식들까지 생산할 수 있었을 정도다. 천사들은 인간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그렇게 하지만 악령들은 자기 정체를 감추기 위해 그렇게 한다. 

그런 능력으로 물체로도 자신을 변형시키는 것이 예컨대 "외계인의 우주선" 등이다. 자신을 변형시킬 수도 있고 그런 임시 변통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을 급조하는 능력도 있다. 우리 인간으로 기준하면 거의 무궁무진에 가깝다. 상대적으로, 이 자연계 육체로 전락한 우리가 얼마나 무기력하고 비극적인지 이로써도 절감하게 하는 대목이다. 말 그대로 사탄(우리말 성경은 "사단"이라 되어 있으나 발음상의 문제다)은 이 세상 신(神)이다. 따라서 그 정체를 까발리는 누구든지 특심한 증오와 공격의 대상이 됨은 당연하다. 필자도 그 중의 하나다. 필자도 이미 죽음의 고난을 각오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된 이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이 세상 신의 공격과 증오의 대상이 됨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를 전화위복으로 돌리셔서 이 죽음의 고난 받음이 그리스도 곧 마지막 아담의 사람 살리시기 위한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되게 하셨으므로, 이러한 기쁨과 큰 보람으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수용하고 감내하도록 하신 것. 따라서 고난을 받으면 받을수록 장차 나타날 영광도 크게 하신 것("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가벼운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무거운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고후 4:17")이니 모든 것이 다 때가 있고 목적이 있다고 한 솔로몬의 지혜의 정의(定義) 그대로다. 

그러면 묻기를 인간에게 결과론적으로 유익한 것을 왜 사탄이 하느냐 하겠는데, 묘한 것은 인간이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스스로 그 말씀대로 지켜 행하기를 즉 믿기를 거부한다는 데에 있다.  말할 수 없는 크신 사랑으로 인간에게 크나큰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지만 이러한 하나님 믿기를 많은 사람들이 거부하는 것을 보라. 이 역시 '인간의 교만'이다. 사탄은 이 틈을 노리는 것이다. 위협을 해도 회유를 해도 그대로 먹혀들기 때문이다. 

성경에 사탄이 교만함으로써 범죄에 이르렀다고 했는데 교만은 남보다 비교 우위에 있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법. "비둘기 같이 유순하고 뱀과 같이 지혜로우라" 하신 대목이 있는 바 우리는 뱀이 어느 정도 지혜로운지 알 수 없으나 만물을 지으신 분께서 그렇다 하시므로 그런 줄 아는데 따라서 자연계의 뱀의 대칭형인 용이 동료 영물보다 머리가 좋은 것은 명백하다. 이 머리 좋은 것을 악용할 때에는 "가장 간교한 것"(창 3:1)으로 나타나게 마련.   

앞에서 "그룹"에 대해 언급했지만, 그룹과 스랍(seraph)들은 어떤 면에서 차이가 있는지 모르나 만물의 양면성 이치가 적용된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다. 이들은 "6일" 창조 이전의 피조물들이다. 이 "6일"도 우리가 아는 1년 365일의 날 수와는 무관하다(창 1:14). 성경이 인간이 지어낸 것이라면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지어낼 줄도 모른다. 뿐 아니라 성경은 여타의 것은 과감히 생략해버린다. 구원의 길을 밝히려 함이지 우주 생성에 대한 공부를 하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것만 이야기하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이 세상 신이 시시콜볼 잡다한 것을 두고도 사람의 생각들을 분산시키고자 혈안이 되어 있는데, 이런저런 사정들을 말해보아야 사탄에게 인생들들 속이는 호재(好材)로만 악용될 것이기 뻔하다. 또 설명한다 해도 자연계에 속한 존재가 되어 모든 것이 제약된 상태에 놓인 인간이 능히 수용할 수 있는 그런 지식일 수도 없으니 덕될 것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물이 어째서 생겨났는지 그 물 속에 뭍이 어떻게 되어 풀어져 있었는지 도통 설명이 없다. 이 역시 이야기를 꾸며낸다면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다.   

창조는 초창기(준비기)와 완숙기로 양분되어 대칭꼴을 이룬다. 지금은 초창기에 불과하다. 창조주의 역량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성향에 따라 불가피하게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다시 말해 창조의 뜻에 벗어나는 무자격자(생명에 관한 한)가 각자 자유 의지에 따라 생겨나기 때문. 그래서 처음 세계(6일 창조 전)에서는 "그룹" 중의 하나가 이탈자가 되었다. 때문에 당시 세계는 물로 망했고(벧후 3:6) 그 다음 세계 즉 우리 세계는 불로 불살라지게 되어 있다(:7). 그래서 물로 종결되는 세계와 불로 종결되는 세계로 짝 지어져 있다. 그렇게 처음부터 정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계속 그런 이탈자가 생겨나기 때문. 

이와 같이 범죄자가 생김으로써 필연적으로 중단될 수밖에 없는 세계(초창기)와 그런 변화가 두 번 다시 없는 세계 즉 새 하늘과 새 땅(완숙기)으로 최종적으로 짝 지어지는 것이다. 그 때 가서야 본격적으로 생명을 누리는 자는 생명의 환락을 즐기게 되고, 그 반대 쪽에 해당되는 이들은ㅡ인간이든 영물이든ㅡ생명과 정반대되는 것만 무궁한 세월 동안 끝도 없이 당하게 되어 있는 것.  그러므로 이런 위치에서 살고자 함으로써 나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나 자신이 들어 부정적으로 결정 짓는 것은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치고 몸서리날 일이니 한사코 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힘을 경주할 일이다. 마지막 아담을 통하여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하심을 입어 사랑의 생명의 길 외곬으로 나아가 충성하면 되는 것이다. 싸울 때는 싸우고 일할 때에는 일을 하고 울 때에는 울어야 하는, 때를 분별하는 지혜가 요구된다.   

지금은 악령들과 인간이 전쟁하는 때이다. 이 전쟁은 인간의 범죄 몰락으로 시작하여(창 3:15) 마지막 아담의 천년 통치 말기까지(계 20:9) 지속되는 성질의 것으로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일함(work)"과 맞물려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악령의 유일한 목적은 가능한 한 사람들이 구원되는 것을 막는 데에 있기 때문. 그리 되어야 자기에게도 숨 돌릴 여유가 있을 것이라 계산하기 때문이다. 그가 이 세상의 신인데 어찌 당신을 금방이라도 처치하지 못하느냐 하고 누가 묻는다면, 이 세상 신이지만 그래서 "이 세상이 악한 자 안에 처해 있지만"(요일 5:19) "만지지도 못하는"(:18) 것은 마지막 아담께서 자기와 하나되어 있는 모두를 지켜 보호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고난 받느냐 하면, 고난 받는 것이 사람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기 때문(빌 1:29)이요 따라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기 때문. 이 고난 받음은 아직도 죄 중에 있어 죄인으로서 받는 저주에 함께 함으로써 즉 그들과 하나됨으로써 나의 생명과 하나되게 함 즉 구원하여 살려낸다는 바로 한 몸됨의 이치 둘이 하나됨의 이치를 따름이다. 그래서 3위1체 원리는 삶의 법칙이기도 하고 인간 구원의 원리이기도 한 것이다. 만유 창조의 법칙이기도 하고 그렇게 창조된 만유를 유지 존속시키는 법칙이기도 한 것. 악한 자는 그리스도와 하나된 자들을 증오하고 인간 구원의 사업을 사력을 다해 저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그것이 또한 우리에게는 유익이 되고 덕이 되는 것이니 이와 같이 모든 일이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와 같은 것이다. 

악령이라고 함은, 똑같은 사람이지만 그 행동이 악할 때 악인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거룩한 천사들과 애초 똑같은 선한 영물들이었지만 중도에 자아중심으로 나감으로써 악하게 된 것. 자연계 동물들은 악하고 선함이 없지만, 초자연계인 에덴 동산에서 창조된 "각종 짐승들"(창 2:19)은 인간(아담)을 위해 창조되었으므로 이지적 인격적 존재로서 모양만 사람과 다르지 사람과 하나도 다름이 없고 오히려 지적인 면에서는 사람보다 월등하여 그래서 인간(아담)을 보좌하게 되어 있었던 것. 반면 거룩한 천사들은 악령들처럼 심적 요동을 일으키지 않고 끝까지 옳음과 선함(좋은 것)을 따라 충실했기 때문. 우리 사람으로 치면 의인(義人)들인 것이다.  

NASA는 그 후 그 사진이 나도는 것을 싫어하여 차단시키고 있는 모양. 그러나 이미 사진은 널리 유포되고 있는 실정. 진실을 똑바로 알려고 해야지 그것을 은폐한다고 무슨 소득이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진실을 생명으로 하는 과학도의 자세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싫건 좋건 시대는 초자연계 영역의 문턱 위에 올라 서 있다. 이 세상의 신(神) 즉 용(ㅡ계 12:9:20:2/고후 4:4) 자신이 창조자 하나님으로 가장하는 때가 임박했기 때문이다. 적(anti) 그리스도의 출현.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하기 위한 최대 규모의 사기극이다.


문명 발달은 단적으로 말해서 이 악한 자의 출현을 위한 들러리에 불과한 것. 인간 생활의 편익을 위한 것이 아님. 세계를 일순간에 완전 장악하고 통제하기 위한 가장 효과 있는 방책이기 때문. 20세기에 들어 갑자기 화산 폭발하듯 용수철 튀어오르듯 급속도로 지식이 상승하고 교통, 통신 분야의 발달이 현저해지는 이유이니, 이를 벌써 다니엘이 예언한 바 있다(단 12:4). 그 때에 가서 창조주 찾고 초자연계 찾고 하면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니 벌써 악한 자의 장중에 완전히 사로잡혀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때는 지금 이 때뿐이다.


이루 헤아릴 수도 없는 천체가 난립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질서 정연하게 나열되어 있는 것





"일월 성신 하늘 위의 군중(host, 天體들)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분정(分定)하신 것"(신 4:19ㅡ"which the Lord thy God hath divided unto all nations under the whole heaven")ㅡ그러므로 하늘의 모든 천체들, 모든 별은 그냥 아무렇게나 위치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개개인과 관계되어 있다. 아담 이후 모든 인간, 수도 헤아릴 수 없는 모든 인생들 각자의 생애와 연관되어져 있는 것이다. 인간 우주의 확대판이라 할지,대칭(상칭, 대립)된 그 무엇이라 할지.... 

인간이 우주의 중심. "외계, 외계인...운운"은, 초자연계 육체(첫 사람 아담)로부터 자연계 육체로 전락하여 자연법칙에 예속됨으로 인해 창조 당시의 정상적인 뇌의 성능 그 1%도 제대로 활용 못하고 있는 인간을 쥐고 흔들어 마음 내키는 대로 속이고 꼭두각시 춤을 추게 하는 악령들의 어이없는 기가 차는 속임수. 중국 일원의 동양권에서 신선(神仙), 선녀, 선계 운운 하며 속여 왔던 것을 재탕, 삼탕해먹는 것뿐으로 천문학적 지식이 월등하고 첨단과학을 자랑하는 현대에 발맞추어 무대에 올려놓는 신종 사기극.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사 66:1) 

지구가 하나님의 발등상이라면 하나님이 위치하신 곳이 이 지구 곧 모든 우주의 중심이다. 사람들은 수박 겉핥기로 겉모양만 보고 지레 짐작하고 판단한다. 즉 지구가 우주의 한 쪽 켠 변두리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변두리에 있는데 어찌 우주의 중심이냐 하고 제법 아는 척을 하지만 모두 어리석은 말이다. 우주 전체가 하나님의 옥좌이고 맨 아래에 지구 곧 그 발의 발등상.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옥좌에 앉으셨다가 일어서실 때 우주의 어디를 딛고 서시는가. 바로 이 지구다. 







2016년 1월 13일 수요일

(2016ㅣ2:12 수정) 안내 말씀



★ 안내 말씀 ★


영어권 독자들이 대상인 영문으로 작성한 블로그 외에는 모두 내용을 동일하게 하여 이리저리 접속하는 불편 없이 한 블로그에서 모든 내용을 알 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naver 블로그(http://blog.naver.com/trinia)는 3위1체의 원리 설명과 이를 검증하는 3운(三運)법칙에 대해 상술하고 있고,
daum 블로그(http://blog.daum.net/trinia)에서는 메시아 예수님(마태, 마가, 누가, 요한 4복음서를 한꺼번에 보는), "확대 로마서"(사도들의 모든 서신을 일괄해서 보는), 사도행전 및 계시록 현대어로 읽기와 3위1체 원리를 근거로 한 3환(三環) 법칙에 대해 상론하고 있습니다. 이상 블로그에 올려진 글의 내용 소개입니다.   

4복음서 한꺼번에 본다는 것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서가 비슷한 내용이지만 따로 엮어져 있으므로 각권을 일일이 볼 생각은 없이 다 아는 내용이라 여기고 각 복음서가 저마다 가지고 있는 중요한 대목을 간과하는 수가 많은데 이를 극복하고 모두 찾아 보는 이점이 있어 유용합니다. 그리고 성경에 관심이 있어 읽어보려고 하는 이들 특히 학생들에게 장애가 되는 고어 등을 모두 현대어로 고침으로써 읽는데 부담이 없게 했습니다. 적극 소개 권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확대 로마서 역시 로마서를 중심으로 하여 기타 사도 서신들을 총망라하여 일괄해서 볼 수 있도록 편집한 것이므로 각 사도 서신의 대목들을 서로 대조해서 보는 장점이 있어 역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글 블로그로는 아래의 것이 있습니다ㅡ첫번째 사이트에서는 고 이병철 전삼성회장의 24개항 질문에 대한 답변을 다루고 있습니다.  
http://trinia5.blogspot.com
구글 블로그는 네이버, 다음, 네이트 등 국내 검색창에서는 접속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글 검색 창에서는 네이버 또는 다음 블로그로 접속이 됩니다. 그러므로 위의 구글 블로그 주소는 구글 검색창을 이용하는 분들이 네이버나 다음 블로그를 방문하신 다음 다시 구글 블로그로 되돌아가실 때 사용하는 접속 주소입니다. 

 
아래는 나머지 현재까지의 블로그 주소 목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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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그 북(전자책)



 
모든 블로그에 올린 중요한 글을 다음(daum) 블로그에 옮긴 후 
전자 책을 발행할 예정합니다
처음 발행된 책은 신약성경 사도 행전 및 4복음서를
간결하게 압축하여 항목별로 보는 내용입니다
다음 블로그 페이지 왼쪽 달력 아래 부분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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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색어 ★

naver(네이버) 검색에서 아래 검색어를 치시면 "보어와의 논쟁...운운"에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3운법칙 아니면 3환법칙 또는 아인슈타인이 틀렸다
(naver에서 3운법칙3환법칙 모두 블로그에서는 단독으로 나옴) 

daum(다음), nate(네이트), google(구글) 검색에서는
 3운법칙3환법칙



보어와의 논쟁 아인슈타인 틀렸다의 검색어로 치시면 
naver, daum, nate, google 검색에서 모두 나옵니다. 

보어 논쟁 아인슈타인만 쳐도
google에서는 '관련 검색'에서 3위1체 원리 심볼마크(태극 문양)가 뜨고
naver에서는 '통합검색' '블로그'에서 대부분을 차지해서 뜨고
 daum에서는 좌편 메뉴 '이미지'를 누르면 전부가 뜸(아인슈타인, 보어 사진 제외하면)

3운법칙3위1체를 치면
google검색에서만 '전체'에서, 이미지에서부터 블로그까지
전체가 일색(一色)으로 나옴
naver, daum 등에서는 그렇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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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개설했으나 지금은 비밀번호를 잊어 못들어가는 영구 휴면상태로
"회개하라!"는 적절한 메시지 하나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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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글, 그림은 저작권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특별히 copyrightⓒ라 표기되지 않은 한
위 그림을 포함하여
3위1체 원리를 상징하는 마크, 로고 등을 제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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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도 우리를 위해 간구함으로 함께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선물, 은혜]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해 감사하게 하려 함이다(고후 1:11)[Ye also helping together by prayer for us, that for the gift bestowed upon us by the means of many persons thanks may be given by many on our behalf].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살전 5:25/히 13: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져주시기를 구하라"(살후 3:1,2),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시어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골 4:3),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셔서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해주시기를 구할 것이니"(Praying always with all prayer and supplication in the Spirit, and watching thereunto with all perseverance and supplication for all saints; and for me)(엡 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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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모든 알림 마당을 개설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출생하여 새로 창조됨으로써 영생할 수 있도록 하는 일에 길잡이가 되려는 오직 하나의 목적밖에 없습니다. 온 세계인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언어 장벽을 극복하는 것이 시급하니 영어에 능통하신 분은 자원 봉사로(지금 능력으로는 사례비를 드릴 수 없어) 적극 협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방면에서만 아니라 기타 여러 모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도움의 손길을 뻗쳐주셔서 사람을 갱생시키는 좋은 일에 함께 힘을 보태십시다. 이 목적을 위해
을 설치했습니다. 사이버 주소가 기억되기 쉽도록 영어 모음 aeiou에 웃는 소리가 나는 h를 덧붙이는 별난 방법을 택했습니다. "바르게 영원히 사는 회개 운동(바영사운)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렇게 믿음의 동지들이 모이면 그것이 소박(素朴)한 교회 활동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이면 내가 거기 있다" 약속하셨고 "두 사람 이상이 합심하여 기도하여 구하면 내가 응답하겠다"고 또한 약속하셨습니다. 때가 촉박하고 여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우리로서(고후 6:1) 힘을 결집하십시다.


블로그 내용이나 편집 기타 모든 면에 걸쳐 아무리 잣달다고 생각하시는 것이라도 모두 말씀해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설혹 알고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감사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나의 블로그, 우리 블로그라 여겨주시고 함께 꾸려가는 마당으로 함께 가꾸어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 생각합니다.   


2016년 1월 12일 화요일

3위1체의 원리(만유 존속의 법칙)를 통하여


초자연계의 실존을 주지시키려 노력하는 이유



애초 창조하시던 대로의 정상적 인간 삶의 원리인 한 몸 체제로서 전개되는 초자연계 몸의 초자연계 이상향인 천국("하나님 나라", "하늘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로 성경은 처음부터 명시해 왔다)에서는 머리를 비롯해 나를 상대하는 모든 이웃이 바로 나 자신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 몸 구조에서는 다 하나로서 너와 나의 구별이 없기 때문. 손, 발, 머리, 다리 모두가 제각기 다르면서도 한 몸으로 결집되어 있음이다. 눈, 코, 입 등의 너와 내가 결코 같지는 않지만 하나, 한 몸으로서 기능하는 까닭에 그러하다.

머리로서의 마지막 아담께서는 바로 그 증거(모두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에 대한)로서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다 바치셨으니(갈 2:20) 곧 나를 위하신 십자가 죽으심이다. 우리를 위한 죽으심이나 하나님이시므로 또 동시에 사람이시므로 '우리'와 '나'에 똑같이 통하시는 유일한 사람이신 것. 사람은 육체가 하나뿐이라 사람을 사랑해도 자기처럼 된 한 사람만 사랑하지 여러 사람을 상대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이시므로 여러 사람을 그와 같이 하나처럼 한 사람처럼 다시 말해 나만 사랑하시는 한 사람으로서의 관계를 그 수가 얼마가 되든지 간에 각자 모두에게 두루 통하시는 의미가 되실 수 있다. 때문에 바울 사도는 "나를 사랑하시어 나에게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갈 2:20) 안에서 산다 한 것이다. 그런즉 나 자신의 삶의 확장, 확대, 극대화이다. 이웃이 천명이면 천 배의 다종다양한 삶을 살고 1억이라면 1억 배의 다종다양한 나 자신의 삶을 향유함이다.

이 자연계 몸의 외톨이 삶에 비하면 좋아서든 놀라서든 입이 벌어지고 다물지 못할 지경이다. 머리되시는 주님께서 자신을 나를 위해 바치시고 선물로서 통째로 주신 마당에(갈 2:20/요 4:10/행 2:38) 다른 내 이웃들이야 자기 자신들을 나를 위해 전용(專用)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 자신께서 내게 주신 선물이시기 때문에 나의 소유가 되시어 나와 함께 지금 계신다. 그리고 동시에 나를 소유하셨으므로 나와 함께 사시는 양면성의 동시성.

전도하는 것도 알고 보면 "잃은 양" 하나라도 찾으려고 두루 헤매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의 손이 되고 발이 될 사람을 찾아 다니는 의미가 된다. 그러면 결국 자기를 위하니까 이기주의가 아닌가 하겠으나 핵심은 항상 양면을 동시에 의식함이다. "어렵다, 어찌 동시에 생각함이 실제 가능한가" 할 것이나, 여기서도 양면성으로서의 주종, 대소, 선후, 인과 관계가 작용된다. 즉 양면성이지만 대등하지 않다는 것이니 역시 머리와 몸의 관계다.

그러므로 상대를 위함은 머리 부분이다. '인'(因)이다. '인'은 항상 '인'일 뿐이지 '과(果)'의 색채를 띠는 법이 없다. 그러나 머리 홀로가 아니니 몸이 있음으로써 머리가 비로소 존재 의의가 있는 것인즉, <동시에> '과'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 이런 것이 동시 작용이다. 고로 항상 나를 위하지 않는다는 일념으로만 동기 설정이 되고 결코 남을 통해서 내가 위해진다는 그런 의식이 행동의 목표가 되지 않는다.

마지막 아담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해 목숨을 버림이니, 이를 내게서 빼앗는 누군가가 있어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 버린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다'(요 10:17, 18) 하신 것이다. 만일 "생명을 버리심"과 "생명을 얻으심"이 대등한 것이었다면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끝까지 망설이시고 두 틈바구니에서 고민하셨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예수님의 행보를 살필 때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직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면 이 잔을 제게서 옮겨주십시오. 그러나 저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하신 것이 전부다(마 26:39). 그 기도하시기 전에 또한 제자들에게 고민하고 슬퍼하셔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기까지 하셨다(마 26:37,38/막 14:34).

얼마나 진솔하신 심령의 피력이신가. 한 인간으로서의 죽음 앞에 임하는 얼마나 진실된 가식 없는 고백이신가. "다시 살아날 것이니 아무 거리낄 것도 없다" 하시지 않았다. 이 역시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인 것이다. 그 부활하심이 지어낸 것이라면 일견 이런 잣단 내용을 삽입해 넣을 이유가 없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4복음서 저자들이 서로 약속이나 하여 짜맞추기도 하듯이 일제히 그런 모습을 그려놓은 것도 아니다. 오직 마태와 마가만 기록했을 뿐이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젊은 요한도 그 대목은 무시해 버렸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시는 것은 바로 이 두 틈바구니에서 머리되는 부분을(몸이 아닌) 끝까지 붙들고 충실히 놓치지 않으시는 아들의 그 점 때문임을 친히 밝히신 그대로다. 아들의 뜻이 없는 것이 아니다. 없다면 그것은 기계이다. 내 뜻이 있지만 내 뜻을 거두고 나의 상대를 위하는 즉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내 이웃을 위함으로 그들로 하여금 구원 얻게 하는"(고전 10:24, 33ㅡ바울 사도가 여기서 거듭 강조하는 것을 보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함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터전이 되는 것(8:3).

이런 풍성한 삶을 코 앞에 두고, 이 세상 한 때뿐인, 내일도 보장받지 못하는, 목숨이 오늘 이 시간만일지도 모르는 자연계 삶에 코를 박고 지낸다는 것은 참으로 "미친 마음"(전 9:3)이 아닐 수 없다. 남이 80을 살았으니 나도 80은 살리라고 자신을 우격다짐으로 속이고 사는 궁색함이다. 식욕 다음에 성욕이란 말이 있는데 이 역시 그렇다. 왜 남녀 사이가 그런가 하면 원래 아담 홀로 존재하다가 아담의 육체(갈빗대 하나)로부터 여자가 분리됨으로써 존재하게 된 까닭이니, 3위1체 원리에서 갑, 을, 병 관계다.

애초 홀로 있던 것으로부터 다른 하나가 파생됨으로써 그 둘이 당초 하나로 존재하던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려는 귀소성(歸巢性)인 것이다. 이유가 그것뿐이다. 다른 아무 신비한 것도 불가사의한 것도 없다. 남자에게서 여자가 나오지 않았다면 애초 그런 남녀간의 욕구도 있을 까닭이 없다. 천국 곧 영원한 이상향에서는 남녀 구별이 없으니 그런 동물적 욕구도 없다. 그 대신 그 근본 이치는 여전한 것이니, 왜냐면 아담은 그 육체를 여자에게 그리고 여자를 통해 그 씨들에게 물려주었지만, 우리가 모신 분은 마지막 아담으로서 육체와 상대적인 의미의 영의 근본이시기 때문.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귀소성이 그러하다면 초자연계 영역의 영의 귀소성은 더 완벽하고 더 오밀조밀하고 더 이상적일 것임에는 말할 필요도 없다. 육체의 귀소성은 억지로 비교한다면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즉 지혜자 솔로몬이 결론적으로 말한 대로 이 세상 자연계 삶은 너무 헛되어 "바람을 잡는"(전 1:14) 격이니, 깨끗이 단절하고 이웃을 위해 보람찬 사람다운 일, 즉 영원 멸망으로부터 건져내는 구출작업, 구출작전을 펴는 것이 영원을 두고 후회할 것이 없고 오히려 보람찬 전생(前生, 즉 그 때 세상에 가서 추념해보는 이 세상)을 보냈다는 자부심에 겨워서도 그 행복감은 끝이 없으리라.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 12:3) 하지 않았는가.

참고로, 성경에 네피림(창 6:4/민 13:33)에 대한 언급이 있다. 악령들의 일부가 그 초자연계 몸의 초능력으로 사람의 육체로 스스로를 변환시켜 남성으로 화(化)해 인간 여자의 육체와 결합하여 자식을 생산함으로써 생긴 인간 별종을 말한다. 여기서의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함은 하나님 친히 직접 창조하신 것을 뜻한다. 인간이나(아담만은 제외하고) 자연계 동물은 낳고 낳는 과정으로 통해 간접적 창조에 속하지만 아담이나 에덴동산의 영물들은 하나님 친히 만드신 존재들인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킨다.

그러면 그들은 아담과는 별개인데 여자와의 어떤 관계로 그리하였던가. 인간과는 차원이 다르다. 인간은 전술한 대로 귀소성이 있어서이나 이 악령들은 성경이 밝히는 대로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를 삼았다" 한 그대로다. 자연계에 속한 사람의 육체의 방법대로 해보고 싶었던 것뿐이다. 이 일에 사탄이 선두를 섰다(창 3:15). 곧 세상에 등장하게 될 적 그리스도가 바로 그의 자식인 것이다(:15/계 17:8). 세상에서 말하는 환생, 전생이란 것은 이런 네피림의 장난인 것이다.


사탄이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은 인생들을 보다 효과 있게 속이고 시험하고 장악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이런 일을 하기 위해 사탄이 이 짓을 감행하는 것을 따라 다른 악령들이 저지른 짓거리인데 이들은 이런 불법 행위를 인하여 마지막 심판 때까지 무저갱(bottomless pit)에 유폐되어 있는 상태다(유 1:6,7). 사탄만은 이 세상의 신(神)이요 지배자라는 점에서 유보되어 세상에서 시험하는 자로서의 역할을 하다가 그리스도 천년 통치 기간 중에야 들어가게 된다. 그 대신 그 자식이 무저갱에 들어가 있다가 이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 모두 희대의 아니, 세계 제일의 성인 군자라고 칭송하게 될 것이나 실상은 인류 최대의 사기한(詐欺漢)이다.  




2016년 1월 9일 토요일

3위1체의 원리가 가르치는 인생의 양면성 구조(운명ㅡ그러나 자기 스스로가 결정하는)

덩덩 덩더꿍 지화자 좋구나 덩더꿍 인생의 명암(明暗)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삶을 백안시한다. 연연하지도 않거니와 그 필요를 느끼지도 않고 오히려 옷 적실까 싶어 비 피하듯이 굳이 일부러 피하는 상황이다. 왜냐면 "화 있을 것이다 너희 부유한 자여 너희는 너희 위로를 이미 받았다 화 있을 것이다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릴 것이다 화 있을 것이다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 것이다"(눅 6:24,26) 하셨기 때문이다. "너희 몫에 태인 위로를 이 세상에서 모두 소진시켰다"는 것이니 장차 올 영원 세상에는 한 톨의 위로도 남지 않았다, "위로 받는 것"과 정반대되는 것만 남았다 즉 이 세상에서 맛보기로 당하는 고난 고통밖에 없다는 말씀이시다.


그러면 이 세상 사는 것을 회피하는 그래서 세상 사느라 헛되게 시간을 날려보낼까 전전긍긍 오로지 사람들을 구원하는 한껏 보람찬 일에만 전심전력을 기울이느라 불철주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리스도 안의 사람들은 삶의 낙이라고는 모르고 고난 고통만 움켜쥐고 있다는 말인가? 허나, 사람들 살려내는 이 일에 무한한 만족감을 누리고 다른 그 무엇과도 바꾸려 하지 않는데 어쩔 것인가. 그래서 이에 수반되는 고난 고통도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판인데 어쩔 것인가.


이야기의 주제가 다른 것이다. 번지 수가 틀려도 한참 틀렸다. 삶에는 단 것만 있지 않고 쓴 것도 있는 법. 아무리 이 세상 삶을 즐겨도 단 것만 있던가.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런 것을 이 세상 생활에서 주기적으로 당하지 않고 이 세상과 오는 세상으로 아주 크게 분류해서 나누어 겪는다는 그 차이뿐이다. 어찌 나 혼자 구원 받아 잘 살겠다는 것인가. 모두 내 이웃 전부가 다 함께 구원 받아 잘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ㅡ이것이 하나님이 장치해놓으신(명령하신, 계명을 주신) 양심의 지상 명령이다.


이렇게 사람 살리자니까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어 있는 고난 고통이므로 이런 고생을 치르는 것을 무한한 보람으로 느끼고 <즐기고> 기뻐한다는 것뿐이다. 때를 구분할 줄 알기 때문이다. 지금은 일하는 때이고 싸우는(사람 구원의 일을 한사코 방해 저지하려는 악령들을 상대로) 때이지 편안하게 쉬는(안식하는) 때가 아닌 것이다(히 4:10). 하나님 주신 솔로몬의 혜안(慧眼)도 이 때를 분명히 가릴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으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다"(전 3:1-8)고 하였다.


고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은 영원 세월의 최고도의 낙을 즐기는 측면에 비하면 한 순간만도 못한 이 세상에서의 시간(그것도 내일 어찌 될지도 모를 불확실성의)을 그 삶의<쓴 맛>을 당하는 것에 불과하고, 그것도 이 세상 삶의 <쓴 맛>의 측면과는 달리 내 스스로 자진해서 기쁨으로 뛰어드는 것이므로 가히 비교할 상대도 안된다. 이를 잘 표현해주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righteousness)와 평안(peace)과 희락(joy)이니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는다"(롬 14:17,18) 하는 대목이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먹고 마시는 것"으로 압축되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먹고 마시지 않으면 생명 차체가 한 시도 부지를 못하니까. 초자연계 몸은 그렇지 않고 삶을 즐기기 위해서만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닐까. 안먹고 안마신다 해서 목숨이 결딴 나는 일은 절대로 없으니까. 옷에 걸치는 옷의 화려함이나, 몸뚱이 하나 비 피하고 추위 피하는 수단으로서의 집의 웅장함이 대수가 아니니, 먹고 마심의 식도락으로만 거의 소진되어 이로써만 거의 응집되어 있는 이 처량한 자연계 삶의 몰골이 아닌가. 먹고자 해서 사는지, 살고자 해서 먹는지 헷갈릴 정도의 그런 구차한 목숨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부터 누리기 시작하는 '천국'이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고 부정한 것이며 그 대신 한 아름 넘치게 받아 챙겨 매일 매시간 누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의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한 것. 의 곧 참다운 올바른 삶을 사는 데에서 오는 만끽하는 포만감, 어디 그뿐인가, 나와 함께 1년 365일 사시는 사랑하는 마지막 아담이신 주님의 품 안에서 일하는 그 평안과 기쁨의 잔은 항상 철철 넘쳐 난다. 삶(생명)의 본질은 이렇게 사랑의 교류(교제, 교통, 사귐)에서 오는 평안과 희열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도 생명의 정수(精髓)는 남김없이 꿀 빨아 먹듯이 다 챙겨 먹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위 구절에서 지적한 "의"를 두고 그리스도의 의,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가지신 의 등 쓸모 없는 잡소리를 함으로써 자신을 속인다. 모두 멸망을 재촉하는 상여가 지나가는 소리 그 푸념에 불과하다.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신다"(고전 1:30).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 아님과 같이 마지막 아담께서 나를 대신하여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하여 지혜와 의롭게 됨과 거룩하게 됨과 구속됨의 기반을 닦아놓고 바로 그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을 원동력으로 하여 거기서부터 출발하여 내 스스로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됨을 구축해 간다는 뜻임을 바르게 헤아려야 하는 것이다.


누구를 위하여? 나 자신을 위하여? 천만에. 나를 위하여서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셨고 이제는 내 차례가 되어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시도록 하기 위해 무엇이든 하는 이 새 생명 가운데에서 행하는 나의 일거수 일투족이 아닌가! 이것이 항상 강조하지만 매사 만사(우리 구원을 포함하여)의 동시성과 양면성이다. 어느 일방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이 우주 천하에 존재하지 않음을 웅변하는 것이 만유의 법칙 곧 3위1체의 원리인 것.


때문에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가 나를 그에게 나타내주리라" 하셨으니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그렇게 주님을 내게 나타내주시지 않는다. 하시고 싶어도 하실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 불가능>을 두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우신 것이다. 암탉이 병아리들을 그 날개 아래 모으려 하지만 병아리들 스스로가 오지 않는 다음에야 어쩔 도리가 없음에 비유하신 것이다.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나와 내 복음(구원의 희소식, 복된 소식)을 부끄러워하면 나도 아버지 앞에서 그 사람을 부끄러워할 것이라" 선언하셨고, "나를 부인하면 나도 그를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부인할 것이요 나를 시인하면 나도 그를 시인할 것이라"고 엄중 경고하신 것이다. 모두 동시성과 양면성을 말씀하심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나아가시면서도 아버지와의 둘이 하나되심의 사랑 가운데에서 그리고 우리와의 하나됨에서 오는 "앞에 있는 즐거움"(히 12:2)을 바라보시는 가운데에서 그 넘치는 주체하실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낙심 낙담에 휩싸여 있는 제자들에게 "주시기"까지 하신 것이 아닌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하셨고,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다'(요 15:11) 하신 것이다.


우리의 현재 위치가 꼭 이와 같으니 우리는 주님의 닮은꼴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시편 23편 정도만 애송(愛誦)하는 것으로 그치고 시편 139편은 간과하고 있는데, 물론 23편도 우리 속에 개설된 에덴동산을 말하는 것이지만 139편은 구체적으로 이를 적시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다. 성령 안에서의 나의 모습을 성령의 감동으로 묘사한 그림인 것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앞뒤)를 두르신다"는 것은 나를 안으시는 것이요, "내게 안수(손을 대는 것)하신다" 함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는 형용이니 우리가 그 품속의 아기인 것이다. 우주 만물을 지으신 아들께서도 아버지의 품속에 계시는 것이다(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獨生)하신(외아들이신) 하나님이 나타내신" 것. 하나님 보기를 원하는 사람, 보아야 믿겠다고 하는 사람은 역사상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 그가 하나님이시다.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그대 위하여 그대를 사랑하시어(갈 2:20) 그대를 살리시려 세상에 오심으로써 영원히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므로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합니다"(시 139:6) 하게 되는 것.


그런즉 마지막 아담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았다고 하여 당장 천사와 같은 영광의 초자연계 몸으로 변환됨이 아니고 세상에서 사람들 건지어 살려내는 하나님 아들들로서의 당연한 일을 하게 되어 있음이니(모든 사람이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때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을 것이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셨다"(마 11:28-30).


멍에는 있고 짐을 진 것은 그대로 있다. 그러나 과거 믿기 전 죽은 자로 있을 때처럼 혼자 지는 내 자신의 죄 짐도 아니고 이 세상 신 사탄에게 얽매인 멍에도 아니다. 생활은 여전히 고생 길이고 이전과 다름 없는 고초가 그대로 있지만 이 고난의 의미는 하늘과 땅의 차이로 180도로 바꿔진 것이요 뿐 아니라 나를 자기 목숨 바치기까지 사랑하시는 주님과의 둘이 하나됨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이니 현재 내 위치에 내 옆에 내 앞에 나를 위하여 계시기 때문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쓴 바로 그 편지에서 바울 사도는 따라서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니(역설하니) 기뻐하라"(4:4) 한 것. 구원을 받았든 그렇지 않든 무릇 인생은 아래 그림과 같다. 또 하나의 자기 자신의 모습을 항상 어깨에 둘러메고 가는 것이다. 양면성과 동시성의 모습이다. 




ⓒ Kwon Tayseek


덩덩 덩더꿍 덩덩 덩더꿍
에헤야 좋구나 덩더꿍 지화자 좋구나 덩더꿍

덩덩 덩더꿍 덩덩 덩더꿍
에루화 좋구나 덩더꿍 얼씨구 절씨구 덩더꿍

덩덩 덩더꿍 덩덩 덩더꿍
덩실 덩실 덩더꿍 덩지 덩지 덩더꿍

①지금 지화자 덩더꿍 하고 좋아라 하는 사람은 그 정반대의 상황을 항상 운명적으로 둘러메고 가는 것이요, ②지금 사람 살리는 영적(靈的) 의술, 인술(仁術)을 베푸는 이들은 이 일을 함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온갖 고초 시련 속에서도 덩더꿍 흥에 겨운 또 하나의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것이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함", "매사에 감사함"(살전 5:16,18)이다.




덩덩 덩더꿍
땅땅 땅다콩


또한 ①의 경우 영원한 <기쁨 없고 평안 없음>의 자기 자신을 둘러메고 가는 자기 운명 자기 결정의 걸음걸이요, ②의 경우 영원 복락의 <덩더꿍 지화자>와의 불가분의 관계를 의식하면서 또 그러한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가고("구원을 이루어가고") 있는 모양새다. 이런 양면성의 인생의 모습은 이 세상에서만 한정된다. 오는 세상, 영원 세계에서는 단 하나뿐인 이 세상과는 달리, 그 세상의 구조 자체가 양면성으로 갈라져 있기 때문에, 인간의 모습은 영원 멸망에 있든지 복락에 있든지 단일 구조 즉 생명의 낙을 누리면 영원히 생명의 낙 일색으로만 누리고 멸망의 죽음 고통이 안겨지는 경우에는 그 영원한 고통 일색으로만 받게 되는 단일 구조다. 고로 이 세상에서 부유한 자는 그 영원 세계에서는 다시는 받을 위로가 없다 하신 것이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의 의미ㅡ"하늘에서는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님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습니다"(시 73:25). 아들께서는 아버지의 형상이시니 아버지께서 또한 그러하시다. 그래서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 하여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 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뉜다.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 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한다"(고전 7:32-34) 함과 같다. 이 세상에서나 천국에서나 주님보다 내게 더 가까운 사이가 없으니 그 사랑에서, 그 모습에서, 그리고 나와 '둘이 하나됨'에서 그러하시다.

그림은 trinia2.blogspot.com
"세계 하나밖에 없는 거꾸로도 읽는 책"에서 옮겨 온 것입니다
위의 그림을 거꾸로 돌리면 아래 그림 모습이 되고 아래 것을 거꾸로 하면 위의 모습이 됨